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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재동 백송

tipInfo 2017. 3. 5. 02:01


문화재 지정
천연기념물 제8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35번지 헌법재판소 내

 

600여 년 된 재동 백송은 헌법재판소 뒤뜰 축대 위에 있다. V자 형태의 가지가 넘어지지 않도록 양쪽 가지를 쇠막대로 받치고 있다.
   
100년 만의 대설이 내린 순은의 아침.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백룡이 꿈틀댄다. 은빛 비늘을 반짝이는 두 마리의 용은 막 천상으로 오를 기세다. 눈부시다. 땅에 뿌리박고 사는 나무가 이렇게 고귀한 자태를 지닐 수도 있던가. 늘 푸른 잎은 천상의 족속을 닮았다. 우아한 날개는 9만 리를 난다는 상상의 새 대붕(大鵬)의 노래를 기억하고, 뿌리는 정녕 지구의 핵에 가 닿았을 것만 같다.

빽빽한 빌딩 속에서 경황없이 밥벌이하는 회색 도시인들은 자신이 숲의 자손임을 기억하지 못한다. 안국역 2번 출구를 나와 헌법재판소 정문으로 들어간다. 백송(白松)이라는 말만 꺼내도 경비실에서 친절하게 일러준다. 대한민국 최고의 영향력과 신뢰도를 지닌 공공기관은 다른 사법기관에 비해 사뭇 개방적이다. 9개의 무궁화가 조각된 대리석 건물을 오른쪽으로 돌면 북서쪽 모퉁이 바로 그 자리에 수령 600년의 은현한 성자가 V자를 그리고 서 있다. 새뜻한 거목 체험이다. 크고 오래된 나무는 나이와 몸피만큼이나 감동을 자아낸다.

서울에서 꼭 봐야 할 나무 한 그루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재동 백송을 들겠다. 도심 한복판 헌법재판소 안의 재동 백송 앞에 서면 하늘에서 ‘신비의 사다리’가 내려온다. 그 사다리를 한 계단 두 계단 타고 오르는 건 행복한 일상 탈출이자 원형성에로의 회귀다. 세상의 중심에 선 우주목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나무에는 정령이 있다던가. 사람은 연년세세 갈리지만 나무는 수십 대에 걸쳐 한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고스란히 세상사를 관조하기에 신성을 부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 백송처럼 빼어난 수형(樹形)을 지녔다면 시민들의 예찬을 받아 마땅하다.

헌법 질서 수호와 국민 기본권 보장을 위해 설립된 헌법재판소는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동성동본 금혼, 그린벨트 규제, 과외 교육 금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미국산 쇠고기 고시, 행정수도 특별법 등을 심판하며 늘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다. 그때마다 여론이 들끓고 국민들의 눈과 귀는 헌법재판소가 있는 재동으로 쏠렸다.

민감한 사건을 심판해야 할 때, 아홉 명의 재판관들은 장고(長考)를 거듭하며 치열한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들은 점심시간에 백송 아래 산책로를 뒷짐 지고 거닐곤 한다. 고색창연한 기와집(윤보선[尹潽善, 1897~1990] 대통령 생가)과 돌담, 그리고 수려한 백송이 자아내는 운치에 무젖다 보면 심신이 편안해졌다. 동료 재판관들과 담소하며 그윽이 백송을 우러러보기도 했다. 백송을 보자면 자연스레 하늘을 보게 된다. 직립보행의 인간이 하늘을 떠받들고 선 성자 같은 나무를 올려다보는 건 서로 빼닮은 꼴이어서 더 정겹다. 해맑은 날이건 흐린 날이건 높은 하늘은 말이 없고 백송은 늘 정갈하며 기품이 넘친다. 재판관들은 그렇게 백송을 우러르며 결단의 순간들과 만났다. 서로 터놓지 못한 속내는 웅숭깊은 나무에게 속삭였을 법도 하다.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은 조선 왕조 창업 즈음에 누군가가 중국에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이 머지않은 북촌(北村) 사대부가의 뜰에서 귀공자로 자랐다. 영조 때 재상 조상경(趙尙絅, 1681~1746)이 이 백송을 즐겼고 이후로 풍양 조씨들은 구한말 세도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흥선대원군의 작은 아들 고종을 임금으로 등극시키는 데 공헌한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조대비(趙大妃)가 그 중심축이었다. 다른 한 축에 안동 김씨들이 있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를 끝내고 왕정복고를 시도한다. 모두가 불안해할 때 대원군은 이 백송의 둥치가 전보다 더 새하얗게 변하는 걸 보고 상서롭게 여겼다고 한다. 그에게는 무정한 자연물에서 어떤 기미를 보고 인사를 점치는 특유의 직관력이 있었던 듯하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6), 개화파 홍영식도 이 백송을 뜰에 두고 즐겼다.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은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막을 내리자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그 집은 광혜원으로 거듭난다. 1885년 2월 고종은 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세웠다. 광혜원은 12일 만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알렌은 제중원에 세브란스 연합의학대학(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을 만들고 학생들을 선발한다. 제중원은 많은 외국인과 내국인 환자들을 치료했고 1887년 시설을 늘려서 구리개(銅峴)로 옮기게 된다. 병이 나면 주술을 쓰거나 굿을 했던 조선인들에게 이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신통한 곳이었다. 개원 1년 만에 1만 명의 환자를 돌봤다니까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아주 높은 비율이다.

그 후 백송이 있는 터와 건물은 대한제국이 매입해서 관용으로 쓰다가 경기여고와 창덕여고가 거쳐갔다. 지금의 헌법재판소는 1993년에 들어섰다.

헌법재판소 건물을 신축할 때, 백송은 터줏대감 대접을 제대로 받는다. 고고한 600년 은자의 품격에 걸맞은 영역을 확보해주느라 남향을 포기하고 동향으로 지었던 것이다. 터를 닦을 때부터 관여했던 어느 국장은 그때 그런 선택이 참 잘한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여름날 집무실에 쏟아지는 강렬한 석양 때문에 불편이 많지만 백송의 운치를 살려내 시민들과 함께 즐기는 명소가 됐기 때문이다. 견학 온 학생들,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백송 산책로로 간간이 이어진다. 나무 한 그루가 최고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기관만큼이나 대접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1995년 9월 26일 백송은 외상을 입었다. 사나운 돌풍에 그만 북쪽 둥치의 큰 가지가 부러졌다. 헌법재판소 가족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나무 의사가 달려오고 정성스러운 치료에 들어갔다. 잘려진 가지를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여러 토막으로 잘라서 재판관들 방에 두고 기념물처럼 완상했다.

재동 백송은 아주 건강하다. 그의 자목(子木) 두 그루는 인근 정독도서관에 뿌리를 내린지 30년이 넘었다.

이곳 터가 세다고 말하는 호사가들도 있다. 일찍이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은 김종서(金宗瑞, 1383~1453)를 제거하면서 피를 뿌렸고 그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이 재를 뿌렸대서 재동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홍영식의 죽음과 제중원 환자들의 죽음도 연상된다. 하지만 도성 심장부 근처에서 그만한 역사적 사건은 흔한 일이고 제중원의 경우도 죽어나간 환자보다 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한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진다. 헌법재판소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백송을 감상하고자 방문하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명당이라고 한다. 우아한 노거수 한 그루가 주는 밝은 기운이 이처럼 크고 값지다.

우리는 흔히 잊을 수 없는 사람과 의미 깊은 날을 기념하여 나무를 심곤 한다. 600여 년 전, 어느 이름 모를 이가 심은 재동 백송은 사연 많은 역사를 조목조목 관찰해온, 입이 무거운 목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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