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대여왕은?
1. 선덕여왕(632~647)
선덕여왕은 서기 632년 진평왕은 노환으로 숨을 거두고 첫째딸 덕만이 왕위에 올랐는데,선덕여왕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입니다.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인 측천무후보다 50년이나 앞서 신라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김덕만이고 천명공주와 선화공주가 동생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덕만이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후덕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두 가지 이야기를 실어 여왕의 지혜를 비유했는데 그 첫번째가 모란꽃일화입니다. 모란꽃일화는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 없었던 모란꽃씨와 그림이 그려진 병풍을 신라 진평왕에게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덕만이 모란꽃이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덕만의 말대로 꽃에 향기가 없었습니다. 두번째는 덕만이 왕위에 오른 후의 두꺼비 일화입니다.
두꺼비 일화는 영묘사의 옥문지라는 연못에서 한겨울인데도 이상하게 두꺼비들이 계속 울고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왕이 두꺼비는 성난눈을 가지고 있으니 적군의 모습을 상징하고, 옥문지에서 울고 있다는 것은 서남쪽변경의 옥문계곡을 상징하는 것이니 군사를 보내어 적군을 물리치라고 했는데 옥문게곡에는 백제 장군 우소가 신라의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군사 500여명을 이끌고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성이 통치자가 되는 것은 요즘에도 힙든 일인데,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전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일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천부적인 지혜와 덕망으로 위기에 빠진 신라를 구해냈고, 훗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렸했습니다.선덕여왕은 인재를 알아보는 높은 안목으로 남들이 꺼려했던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을 발탁했으며,여왕이라고 얕보며 침입을 일삼던 고구려와 백제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분황사,첨성대,황룡사9층목탑등 신라시대 최대 최고의 문화유산을 남긴 위대한 왕입니다. 그리고 647년 승하하였습니다.
2.진덕여왕(647~654)
서기 647년 선덕여왕이 죽자 왕실에 남은 마지막 성골 신분인 승만공주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녀가 바로 신라 제28대 왕인 진덕여왕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진덕여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승만이고 ,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의 딸이다.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우며 키가 일곱자이고 손을 내리면 무릎까지닿았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선덕여왕에 이어 또다시 여왕이 즉위하자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지만, 김유신과 김춘추의 도움으로 반대세력을 제거하였습니다. 진덕여왕은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큰 알천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안정을 되찾았고, 김춘추를 앞세워 '한화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한화정책이란 중국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 시키는 것으로 당나라와의 외교에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진덕여왕의 의지가 담긴 정책입니다. 그 결과 당태종은 선덕여왕 때와는 달리 진덕여왕에 대하여 여왕이라고 우습게 보거나 문제 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호관계를 더욱 강화한 다는 의미로 '봉호'를 내렸고, 이에 진덕여왕은 감사의 표시로 두 번에 걸쳐 당에 조공을 보냈습니다. 진덕여왕이 이처럼 부지런히 우호적인 대당외교를 펼친 것은 선덕여왕 때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원군을 요청함으로써 생긴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당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덕여왕은 647년부터 8년을 재위하면서 우호적인 대당외고와 혁신적인 정치개역을 시행하고 654년 승하하였습니다.
3.진성여왕(887~897)
신라 제 51대 왕인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로 신라 후기정세가 어지러울 때 즉위하였습니다. 진덕여왕 이후로는 계속 남자들에게만 왕위가 계승되었는데, 정강왕의 유언 때문에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진성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죄인을 사면하고 지방의 조세를 면제해주며 여왕의 즉위에 불만을 갖고 있는 지방 세력들의 불만을 완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가난한 농민을 구휼하는 정책을 펼처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문란한 행실과 실정으로 국가 재정이 위태로워지자, 재위 2년째 되는 해에 경주에 진성여왕을 비난하는 벽서가 나돌았고, 이듬해에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내란에 빠지게 되었고, '견휜'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함으로써 왕실은 본격적으로 지방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진성여왕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당시 불교의 유행종파인 선종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선종승려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여왕의 노력은 쓰러져가는 신라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여왕은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는 커녕, 정국의 안정조차 이루지 못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헌강왕의 서자인 태자에게 왕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유용한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BMW 미래자동차 동영상 (0) | 2009.09.22 |
---|---|
고양이 성형 동영상 (0) | 2009.09.22 |
능이버섯 산행 동영상 (0) | 2009.09.22 |
시외전화 요금제 폐지 (0) | 2009.09.22 |
간에 좋은 음식은? (0) | 2009.09.22 |
대만 김태희 미녀 수의사, 명문대, 조각외모, S라인 몸매 화제 (0) | 2009.09.21 |
美서 식인 구렁이 '탄생' 우려 (0) | 2009.09.21 |
이가 시릴때 (0) | 2009.09.21 |
LA로 돌아온 린제이 로한 편안한 공항 패션 (0) | 2009.09.21 |
피해야할 레깅스 (0) | 2009.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