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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음식 이야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2. 13. 23:09
설날의 기억은 맛에서 온다.
 
코 흘리게 유년 시절, 설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밤새 불린 흰쌀을 머리에 이고 떡방앗간에 가셨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방앗간에 가면 흰 가래떡을 빼는 광경에 마음을 뺏겨 한두 시간 줄지어 기다려도 지루한 줄 몰랐다. 솔직히 김이 설설 나는 가래떡 한 줄을 얻어먹는 재미도 좋았다.
설날 며칠 전부터 외할머니는 무쇠 솥뚜겅을 뒤집어 아궁이에 걸고 콩 볶고 깨 볶아 엿을 묻혀 강정도 만드셨다. 소쿠리에 강정이 수북이 쌓여 굳으면, 어머니는 독 안에다 차곡차곡 담으셨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가 석유곤로 위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전을 부치면 집안 가득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행여 동생들에게 뺏길까 갓 부친 뜨거운 전을 입천장 벗겨지는 지도 모르고 먹던 그 맛이 그립다.
나 어릴 적 설날에는 설빔을 차려 입고 동네 어르신들께 세배를 다니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린 세배꾼이 오는 대로 맛있는 떡과 부침개, 강정이며 수정과며 한 상씩 차려 내던 그 시절 설날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다.
아무리 세월 따라 명절 풍경도 변했다지만, 설날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이다. 설날은 바쁜 일상에 쫓겨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과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도 같이 먹고 덕담도 나누는 자리다.
예부터 설날에는 떡국, 만둣국, 각종 전유어, 식혜, 한과, 세주 등을 먹는 풍습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지금이야 주문만 하면 차례상을 떡하니 안방에 대령하는 세상이라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설날 음식에 담긴 의미를 알고 먹는 것도 뜻 깊지 않을까.
 
 
‘풍성한 재화’ ‘새로운 탄생’ 의미하는 새해 첫 음식, 떡국
 
설날 음식을 통틀어 ‘설음식’ 또는 세찬(歲饌)이라 한다. 설날에 세배를 오는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상을 세찬(歲饌)상이라 하며, 떡국에 나박김치와 식혜나 수정과, 한과 따위를 냈다.
세찬 중에서도 설 상차림의 주인공은 바로 떡국. 설날 차례상은 ‘떡국차례’라 하여 밥 대신 떡국을 올린다. 예로부터 설날 아침에는 떡국을 먹는데, 왕실에서부터 양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흰 가래떡으로 만든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이쯤 되면 굳이 많은 전통음식 중에 새해 첫날 첫 상에 떡국을 올리는 나름의 이유가 궁금할 게다.
길게 뽑은 가래떡 떡가래처럼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큰 이유다. 첨세병(添歲餠)이라 부르며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다.
<경도잡지> (1800년대)에서는 “맵쌀로 떡을 만들어 치고 비벼 한 가닥으로 만든 다음 굳기를 기다려 가로 자르는데 모양이 돈과 같다. 그것을 끓이다가 꿩고기, 후춧가루 등을 넣어 만든다. 또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을 떡국 그릇 수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 하였다.
어릴 적 동네 어르신들께 세배를 가면 “너는 떡국이 몇 그릇째냐.”라고 물으셨다. 물론 내 나이를 묻는 질문이었다.
한편 설날에 떡국을 끓이는 풍습은 최남선의 <조선상식>에 의하면, 흰색의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천지만물의 신생을 의미한다는 종교적인 해석이 담겨있다. 이는 소박한 가래떡처럼 깨끗하고 담박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맞는 다는 의미일 게다.
떡가래 모양에도 각별하고 재미난 의미가 숨어있다. 먼저 시루에 찐 떡을 길게 늘려 뽑는 것은 재산이 쭉쭉 늘어나라는 축복의 뜻을 담고 있다. 또 가래떡을 둥글게 써는 것은 엽전 모양 같은 떡을 먹음으로써 재산이 불어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7080세대들은 하얀 떡에 복과 건강, 장수의 바람을 담은 ‘수복강령’ 같은 글씨를 떡살로 꾹 눌러 새긴 절편을 먹은 기억이 있을 게다.

 
“꿩 대신 닭”이 설날음식에서 유래?
 
지금까지 설날 음식 유래를 읽느라 고생하신 독자분들을 위해 재미난 퀴즈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꿩 대신 닭”이란 속담의 유래를 아는 사람 한번 손들어 보시라. 이 글을 읽은 독자들 중에 십중팔구는 고개를 갸웃거릴 게 분명하다. 정답은 바로, ‘떡국’ 이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떡국은 흰떡과 쇠고기, 꿩고기가 쓰였으나, 꿩을 구하기가 힘들면 대신 닭은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바로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비롯됐다 한다.
요즘은 주로 떡국용 육수로 쇠고기를 많이 쓴다. 떡국은 국물이 맛있어야 하는데, 보통 사골이나 양지머리, 사태 등을 오래 고아서 국물로 사용한다. 사골 국물과 쇠고기 국물을 반반씩 섞어 사용해도 맛이 좋다.
떡국을 끓일 때는 고기장국을 미리 끓여 두어야 한다. 국물이 맛있게 우러나는 양지머리는 고아서 덩어리는 편육으로 먹어도 좋다. 양념한 장국을 끓이다가 준비한 흰떡을 냉수에 씻어서 넣고, 한소끔 끓으면 떡이 떠오른다. 이 때 그릇에 떡국을 담고 웃기를 얹어 낸다. 웃기는 쇠고기 살코기를 다져 볶은 것과 황백지단을 쓴다. 혹은 살코기와 움파를 꼬치에 꿰어 만든 산적을 한 두 꼬치 얹기도 한다.
 

북한 지방의 조랭이 떡국과 만둣국
 
특이하게 개성지방에서는 조롱박 모양의 조랭이 떡국을 끓여 먹는 풍습이 전해내려 온다. 누에고치처럼 가운데 부분을 대나무 칼로 비틀어 잘록하게 만든 다음 끓여 먹는 음식이다.
조랭이 떡국에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일설에는 누에가 ‘길’함을 뜻하므로 한 해 운수가 길하기를 기원하며 누에고치 모양으로 빚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이 설빔에 조롱박을 달고 다니면 액막이를 한다는 속설에 따라 액막이의 뜻으로 조롱떡국을 끓여 먹었다는 것.
일설에는 대나무칼로 떡을 누르는 것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목을 조르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개성(송도)을 수도로 했던 고려가 멸망하자 그 원한을 조랭이떡을 만들면서 풀려고 한데서 기원한 것이라는 얘기.
조랭이떡은 가래떡을 가늘게 늘여서 써는데, 가운데를 대나무 칼로 살짝 굴려 마치 동그란 구슬을 붙여 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떡이 새하얀 것이 눈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반 떡국에 비해 떡이 퍼지지도 않고 훨씬 쫀득하다.
한편 평안도나 황해도, 강원도 출신 사람들은 설날에 떡국보다 만둣국을 즐겨 먹었다.
떡국이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면 만둣국은 ‘복을 싸서 먹는다’는 의미다. 설날 만둣국은 한 해 동안 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하면서 먹는 음식이다.

 
각양각색 한과, 전유어, 전통음료…
 
설날 음식으로 한과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은 각양각색 한과를 손쉽게 사서 차례상에 올리지만, 60~7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형편에 맞게 준비했다.
“설날과 보름에 민가에서는 제사를 지내는데 강정을 으뜸 음식으로 삼는다.”라고 <열양 세시기>에 나와 있다. 신세대 독자들에겐 생소하겠지만, 유과, 다식, 정과, 과편, 엿강정, 당속등 많은 한과류가 있다.
이밖에 설날에는 육류, 어패류, 채소류 등 여러 재료를 이용해 전유어를 준비한다. 고기전으로 살코기, 간, 천엽을 많이 쓰고, 생선전으로 대구, 동태, 새우 등을 쓰고, 채소류전은 빈대떡, 화양적, 느름적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설날 전통후식인 수정과와 식혜도 빼놓을 수 없다. 설날 마시는 전통음료에서도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식혜는 엿기름으로 만든 음료다. 한약명으로 ‘맥아’ 로 불리는 엿기름은 쌀이나 밀가루, 과일 등을 먹은 체증을 해소하는 효능을 가졌다. 그러니 소화제가 귀하던 시절에는 설음식의 유혹에 못 이겨 과식했을 때 식혜를 마시면 속이 좀 편해지지 않았을까.
 
 
★ Tips!  개성식 설음식 ‘조랭이떡국’ 맛집
 
1. 개성집 (02-923-6779)
서울 용두동의 개성식 만두, 조랭이떡국, 순대집. 조랭이떡과 만두를 직접 만들어 손맛이 제대로 느껴지는 곳. 갈비 마구리와 양지머리를 푹 고은 육수로 맛을 낸 조랭이떡국과 만둣국이 일품. 오이를 소금에 절여 부추, 배, 양파 등으로 빵빵하게 속을 채운 오이소박이는 잘 익은 동치미 맛이 환상.
2. 궁(02-733-9240)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이곳은 개성 출신 할머니가 조랭이떡국과 개성만두를 만드는 이북음식점. 얇은 피가 특징인 개성만두를 넣고 끓인 만두전골이 추천 메뉴. 떡국은 물론, 만둣국, 만두전골의 기본이 되는 국물은 사골과 양지머리를 넣어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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