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 배 속에 있는 아기(태아)는 사람인가, 아닌가. 법조계의 오랜 논란에 대해 대법원이 다시 한번 '진통설(분만개시설)'을 택했다. '진통설'은 산모가 규칙적인 진통을 동반하면서 분만이 개시된 시점부터 태아를 사람으로 본다는 이론이다. 분만 직전이 아닌 태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논리다. 이에 대해 종교계가 반발하며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대법원은 1982년 10월과 98년 10월 비슷한 사건에서 진통설을 인정했다.
대법원2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임산부의 출산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태아를 사망하게 한 혐의(과실치상.과실치사)로 기소된 조산사 서모(58.여)씨에게 무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9일 밝혔다.
박시환 대법관은 이날 기자와 만나 "고심을 거듭한 어려운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해외 사례와 국내 제왕절개 현황을 조사했다. 박 대법관은 "현행법 체계상 태아를 사람으로 보는 시점을 바꾸는 것은 다소 이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산율이 높았던 시대가 아니라 임신 때부터 태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첨단 사회가 된 만큼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는 대법관들의 의견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실제 학계에서는 제왕절개가 보편화하면서 "제왕절개를 요구한 시점을 분만 개시 시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진통 전 태아는 '사람'으로 볼 수 없어=문제의 사건은 2001년 서울의 한 조산소에서 발생했다. 당시 37세였던 임신부 이모씨는 출산 예정일이 지나서도 규칙적인 진통이 오지 않았다. 조산사 서씨는 "2주간 더 기다려 보자"며 임신부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았다. 자연분만을 기다리다 결국 태아는 저산소증으로 사망했다. 이후 제왕절개로 5.2㎏의 숨진 태아가 나왔다. 서씨가 과실로 사람을 죽였다고 봐야 하는지가 사건의 쟁점이 됐다. 이 사건은 1, 2심에서 과실치상 혐의가 유죄 선고됐다가 2004년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됐고, 이번에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산모가 진통에 이르지 않은 만큼 이 사건의 태아가 업무상 과실치사죄의 객체인 '사람'이 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과실치상 혐의에 대해서는 "법 체계상 태아 사망이 임신부에게 상해가 된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현행법에서 태아에 대한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은 낙태 관련 범죄뿐이다. 낙태죄 형량은 1년 이하의 징역(또는 200만원 이하 벌금)이다. 업무상 과실치사(5년 이하 금고, 2000만원 이하 벌금)보다 형량이 적다.
일본의 통설과 판례는 일부 노출설이다. 산모의 몸에서 태아의 신체 일부가 나와야 사람으로 인정된다. 한국보다 사람으로 인정받기가 더 어려운 셈이다. 미국은 주에 따라 ▶모체 밖으로 완전히 나왔을 때 ▶모체 내 태아의 반응이 있는 때 ▶12주가 경과된 때 ▶임신 직후의 단계 등 다양한 기준을 채택하고 있다.
이처럼 태아를 사람으로 보는 시점을 정하는 데 신중한 것은 여기에서 갖가지 민.형사적 법률 관계가 파생되기 때문이다. 임신부를 살해했을 때 태아를 사람으로 본다면 두 명을 살인한 범죄가 되는 식이다.
◆종교계 "태아도 엄연한 사람"=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생명으로 인정하는 종교계는 판결에 반발했다. 가톨릭의대 이동익(신부) 교수는 "나라마다 배아 혹은 태아를 생명체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다르지만 '태아는 사람이 아니다'고 단정짓지는 않는다"며 "충격적인 판결"이라고 밝혔다. 서울대 의대 이윤성 (법의학) 교수는 "형법상의 법 적용 대상으로서의 태아를 사람과 구분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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