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한정보

2007년의 한국영화 베스트 10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2. 24. 16:07

[시네토크] 2007년의 한국영화 베스트 10

[이동진닷컴] 저는 매년 그 해의 개봉작 중에서 베스트 영화를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로 나눠 뽑아왔습니다. 사실 창작품에 순위를 매겨서 서열화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해 동안의 작품을 이렇게 정리해봄으로써 간명하고도 흥미로운 자료가 도출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은 먼저 ‘2007년의 한국영화 베스트 10’을 올리겠습니다. 12월 마지막 주 개봉을 앞둔 작품까지 포함하면, 대략 올해는 110여편의 한국영화가 개봉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중 63편의 한국영화를 보았습니다.

리스트 작성을 위해서 돌이켜보니, 2007년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뛰어난 한국영화들이 예년에 비해 그리 많이 나오지 못한 해였던 것 같아 조금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베스트에 넣을 작품들을 하나씩 꼽다 보니, 이 영화들을 보았을 때의 좋았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살아나면서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이 리스트는 2007년 1월부터 12월까지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 작품만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저라고 모든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닙니다. 올해의 경우 특히 ‘오래된 정원’ ‘별빛 속으로’ ‘우리 학교’ ‘포도나무를 베어라’ ‘경계’를 보지 못한 게 안타깝네요. 이 영화들을 보았더라면, 리스트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이 영화들은 나중에라도 챙겨볼 예정입니다.


1위 밀양

영화 '밀양'

지난 5월에 ‘밀양’을 처음 보고 극장을 나서던 순간의 흥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직 일곱달이나 남았지만, 올해 이 작품보다 뛰어난 한국영화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됐습니다. ‘밀양’은 영화라는 매체가 도달할 수 있는 깊이가 어느 정도일 수 있는지 보여준 작품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좋았지만, 특히 ‘밀양’은 ‘박하사탕’과 함께 잊지 못할 전율을 안겨준 작품으로 제게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영화를 만드는 이창동 감독은 수수께끼 같은 세상 속에서 부조리한 삶을 겪는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소름이 끼칠 정도의 사실감으로 그려냈습니다. 동시에 이 영화는 한국 배우들이 얼마나 뛰어난 연기를 하는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도연은 몸으로 살아내는 연기의 파괴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송강호는 이 땅의 가장 훌륭한 ‘연기 예술가’입니다. 연말의 영화와 관련한 각종 시상식에서 두 배우가 연기상을 휩쓸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대해 많은 평자들이 ‘문학적’이라며 일정한 선을 그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밀양’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영화적’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밀양’을 보고도 그의 영화가 문학적이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 사람의 ‘편견’에 대해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위 엠(M)

영화 'M'

이명세 감독은 ‘형사’에 이어 다시금 실패한 듯 보입니다. 강동원이라는 최고 스타를 거듭 캐스팅하고도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그는 ‘엠’에 이르러 대중들 뿐만 아니라 이제껏 그를 지지하는 듯 보였던 평단의 호의까지도 상당 부분 잃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엠’이 독보적인 영화라는 판단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형사’는 꼭 그래야 했는지 의문이 생기는 작품이지만, ‘엠’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확신이 남는 작품입니다. 아예 제작을 포기했으면 모를까, 일단 만들기로 했으면 이명세 감독은 이 영화를 이렇게 밖에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엠’은 몽환 속으로 뛰어들어 꿈의 한 자락을 생생하고도 황홀하게 베어온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건 영화라는 매체가 항상 꿈꾸어오는 목표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자각몽으로서의 영화의 매력을 맘껏 맛보게 해줍니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 보이는 서사는 결과적으로 빈약해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선택적으로 최소화된 겁니다. 그를 통해 완성된 것은 단 하나의 호흡만 불어넣어 만든 영화적 진경입니다. 저는 ‘엠’이라는 영화에 홀려서 결정적 단점에 눈 감은 관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매력적인 홀림이라면, 저는 기꺼이 눈 감은 채 몇 번을 반복해서라도 홀리기를 원합니다.

3위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올해 만난 가장 매력적인 독립영화였으며 가장 뛰어난 데뷔작이었습니다. ‘치정’을 모티브로 삼으면서도, 이 영화는 썰렁한 듯 심심한 듯 유유자적하는 특유의 리듬감으로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관람 체험을 안겼습니다. 치정의 파국이 아니라 치정이 남긴 부스러기를 헤아리는 듯한 화법이랄까요. 기본적으로 유머러스하고 유쾌하면서도 짙은 페이소스의 뒷맛도 안기는 이 작품은 캐릭터들이 생생하고 심리묘사가 탁월합니다. 독립영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강박이 없다는 점도 좋았지요. 그리고 박광정씨의 ‘내추럴 본 소심남’ 연기는 정말 탁월했습니다.

4위 천년학

영화 '천년학'

올 한 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바로 ‘천년학’에 담겨 있습니다. 매화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봄날, 애첩의 판소리를 들으면서 까무룩하게 눈을 감는 노인의 죽음을 담는 이 관조적이고 서정적인 장면은 시청각적으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동시에 현자의 깨달음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한 명장면이었습니다. 꼬리를 물고 교차하는 한 인간의 영과 욕이 재조차 남기지 않은 채 허공 속에 스러지는 모습에 먹먹해졌습니다. 100번째 영화를 만드는 대가 특유의 세월의 무게가 쇼트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앉아 있는 듯한 이 작품은 그 무게를 일순 무화시켜버리는 선의 터치도 함께 담고 있어서 더욱 놀라웠습니다. ‘천년학’에 대한 찬사는 노감독에 대한 의례적 예우가 아닙니다. 이처럼 명징하게 한국인의 마음의 풍경화를 품고 있는 작품 앞에서 본능적으로 터뜨리게 되는 감탄사입니다.

5위 기담

영화 '기담'

‘기담’은 단점이 꽤 있는 작품입니다. 이야기 전달력에 문제가 있고, 편집도 거칠지요. 그러나 이 영화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실로 비범합니다. 이게 연출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박수를 받을 만 합니다. 뛰어난 조형술과 상상력은 이 영화로 처음 발걸음을 내디딘 감독들(정가형제)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게 합니다. 올해도 역시 충무로는 많은 공포영화를 쏟아냈지만, 나머지 모든 공포영화의 성과를 합쳐도 이 영화 한 편의 성과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게 제 솔직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 호러엔 지난 몇 년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귀신이 나옵니다. 말 그대로 무시무시합니다.

6위 행복

‘행복’은 감정적으로 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검고 끈적거리는 타르 같은 이 작품은 보는 이의 손을 잡아 끌어 내면의 지옥을 함께 헤매게 합니다. 일상적으로 툭툭 내던지는 대사 속에 삶의 딜레마를 응축시키는 대사 작법도 일품입니다. 어렵사리 실천해온 금주와 금연을 한 순간 어이 없이 내던지며 한탄하는 주인공에게, 술을 권한 남자가 “몸에는 좋지. 그런데 재미가 없어”라고 툭 내뱉는 대사는 올 최고의 대사로 거론할 만 합니다. 황정민과 임수정의 연기 역시 최상급입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를 무척 좋아했지만, 달라진 허진호 감독의 세계 역시 흔쾌히 지지합니다.

7위 날아라 허동구

가족영화는 충무로가 유달리 강한 면모를 보이는 장르입니다. 이 분야에서 올해 가장 큰 성과는 ‘날아라 허동구’와 ‘좋지 아니한가’에서 나왔습니다. ‘날아라 허동구’는 일견 너무나 평범하고 뻔해 보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를 올해의 베스트 중 하나로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평론가에겐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가장 익숙하고 평범한 재료들로 단단한 감동을 일궈냅니다. 정성 어린 손길로 뭉치고 또 뭉쳐서 만들어낸 감정적 파장은 ‘이야기의 승리’가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8위 좋지 아니한가

‘좋지 아니한가’는 ‘날아라 허동구’의 정반대 지점에서 성과를 냈습니다. 되는 것 하나 없는 콩가루 집안의 구성원들 하나하나에 생기를 불어넣을 줄 아는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테마에 대해 매우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문제제기를 합니다. 캐릭터들이 흥미롭고 에피소드가 신선한 ‘좋지 아니한가’는 배우들의 앙상블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천호진과 문희경을 필두로 한 이 영화의 배우들은 신바람이 나서 하는 연기가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줍니다.

9위 마이 파더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신선했습니다. ‘마이 파더’는 다니엘 헤니라는 특정 이미지로 과소비된 어느 연기자의 전혀 다른 얼굴과 만만찮은 잠재력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드러난 황동혁 감독의 연출력은 매우 성실합니다. 흔하디 흔한 멜로 코드 하나 넣지 않고 우직하고 깔끔하게 메인 테마에만 집중합니다.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고 작품이 지닌 내적인 힘에 집중하는 감독과 배우의 만남은 ‘마이 파더’에서 주목할만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10위 우아한 세계

‘우아한 세계’는 영화 한 편에서 배우 한 명의 비중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 송강호라는 배우는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환경이고 리듬이며 무대입니다. 백번 삼키고 열 번 내연한 끝에 한 번 내뿜는 그의 연기 스타일이 이 작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한재림 감독은 조폭영화와 가족영화를 신선하게 결합해 장르의 갈라진 틈새에서 삐죽 얼굴을 내민 들꽃 같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