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마의 의미와 유래. 그리고 상징
니마는 통신어의 가장 대표적인 단어로서, 마땅히 배워야할 예절을 배우지 못한 slang의 상징입니다. 실제로 니마 안쓰기 운동에서 요구하는 것은 니마라는 특정 단어가 아닌, 문화의 바로세움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니마는 통신에서 상대존칭으로 사용되는 님에, 부름을 나타내는 호격조사인 아를 붙여 부르는 말입니다. 존칭과 비칭이 함께 사용되는 대표적 잘못된 언어사용의 예입니다. 특히 많은 통신어 가운데 니마가 주 대상인 이유는 존칭과 비칭의 복합사용으로 인한, 존칭 자체에 대한 비하를 나타내어, 일종의 비아냥 혹은 빈정거림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심각하게는 선별되지 않은 모든 이에 대한 비하와 마땅한 권위 자체에 대한 비하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불특정인에 대한 호칭에 따라 그 문화의 수준이 대표됩니다. 님아 님들아 니마는 상대에 대한 적절한 존경의 뜻을 가지지 못하며, 단어 자체가 가진 비아냥거림의 특성때문에 그 단어에 대한 제재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니마 안쓰기 운동의 이유는 특정 단어에 대한 배격이나 사용층에 대한 비방이 아닌, 문화의 바로세움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통신어의 의미와 유래
86년 10월 천리안 PC-Serve의 통신 서비스 이래, 매경의 ketel이 91년 12월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컴퓨터 통신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문자를 이용한 대화라는 채팅은 초기 지각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사람이름 혹은 아이디> 님이라는 실생활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통신어가 시작됩니다. 실제로 그 당시는 사람을 xx님이라고 호칭하는 경우에 그 사람을 컴퓨터 통신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인식할 만큼, 통신어는 그 문화권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었습니다.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의 특성상 몇가지 그 문화권 특유의 표현이 생기게 되며, 그것은 90년대 인터넷 대중화와 맞물리며 초기 통신문화권과 다른 양상을 띄게 됩니다.
통신어의 정체성과 성향
초기에는 억양,표정이 전달되지 않는 문자통신의 특성상 감정상태나 억양을 나타낼 수 있는 축약어가 이모티콘이라는 형태로 쓰여지게 됩니다. 미국/서양권은 보통 세로로 누운 이모티콘을 선호하였고 ( 예: :) 웃는 얼굴이 옆으로 누운 형태) 일본/한국쪽에서는 가로로된 이모티콘을 선호했던 것도 하나의 특색입니다. ( 예: ^_^ 웃는 모습) 후기 인터넷 대중화의 시대에서 인터넷 채팅의 다양화로 이모티콘은 굉장한 발전을 누리게 됩니다. 문화권 내의 젊은 층들의 수많은 소규모 문화권 형성을 위한 노력과 어필의 수단으로서 많은 센스있는 이모티콘들이 등장합니다. 그 범위는 거의 아스키 아트(주:문자를 이용한 그림)의 수준을 넘나들 정도로 발전합니다.( 예: --// ㅛ 밥상뒤집기) 문제가 된 것은 그 다음단계로, 어휘 자체에 대한 변화가 통신어에 가해집니다. 필자 스스로도 이것이 바람직하다, 하지 않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계속 설명할 다른 부분에 있습니다.
좀 더 편리한 통신어의 구사와, 감정이나 억양의 표현을 위해 문장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나도 사랑해와 나두~나두~~~ 따랑행~~~ H워얼V라는 문장에 감정 역양의 표현능력의 차이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인 실생활의 범위를 넘나드는 사교활동을 위해서 표정과 제스쳐,억양이 전달되지 않는 지극히 폐쇄적인 문자통신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부분이었고, 그리 문제라고 부를 부분도 보이지 않습니다.
통신어의 적절한 제어와 그 필요성
문제는,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하는 것과, 어쩔수 없이 하는 경우의 차이입니다. 쉽게 설명해서 위에 예를 든 나도 사랑해를 예로 든다면, 나도 사랑해라는 글을 알고 있는 사람이 후자의 예인 따랑행을 구사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나도,나두,사랑해,사랑헤 등 애초에 그 철자조차 모르는 것을 무마하기 위해 통신어가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 주장에 대하여, 언어의 변화등의 여러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글 후반의 여러가지 주장과 그에 대한 답변에서 다루겠습니다. )
아타나시아의 니마 안쓰기 운동은 단순히 언어순화 이외에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른 언어의 사용 외에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문화에 관한 것입니다.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 (文化) 인간의 공동 사회가 이룩하여 그 구성원이 함께 누리는, 가치 있는 삶의 양식 및 표현 체계. 언어·예술·종교·지식·도덕·풍속·제도 등은 그 구체적인 예임.
-야후 국어사전 인용:http://kr.kordic.yahoo.com/result.html?p=%B9%AE%C8%AD
이 정의에 의하면 아타나시아 문화는 아타나시아에 관련된 공동체가 이룩하여 그 구성원이 함께 누리는 가치있는 양식과 표현체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업적 목적을 가진 게임 아타나시아로서는 문화 자체를 만드는 것도 꽤나 요원한 일이겠습니다만 공동체의 문화란 어떤 특정한 주제로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곳에 형성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아타나시아 문화라는 단어 자체가 오만방자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아타나시아의 특정 상품에 대한 포장이 아닌, 이용자 즉 공동체에 대한 양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같은 의미로, 통신 문화는 컴퓨터 통신에 관련된 공동체와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있는 양식과 표현체계입니다. 그 양식과 표현체계에 따라 훌륭한 문화와 저질 문화가 구분됩니다.
바른 문화가 필요한 이유는 풍요로운 문화는 그 구성원의 정신과 생활을 풍요롭게 하며, 저질문화는 그 구성원의 정신과 생활을 피폐케 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문화에 속하고, 바른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구성원 스스로의 발전과 정신적 풍요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바른 문화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바른 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까?
바른 문화에 수반되어야 마땅한 예절과 배려,사려깊음은 사교활동을 수반하는 모든 문화가 마땅히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게임도 예외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아타나시아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타나시아는 특성상 통신문화와 게임문화. 이 양쪽에 모두 속합니다. 그 둘이 젊은 층들의 주된 문화라는 면에서, 신세대 문화라는 것과도 연계됩니다. 아타나시아 문화가 소중한 이유는 바로 그런면 때문입니다. 문화는 그 구성원을 대표하는 동시에, 그 구성원의 정신세계의 구성과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아타나시아 문화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첫단추의 소중함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니마 안쓰기 운동은 그 소중한 첫단추입니다. 이 첫단추에 동참함으로 문화의 중심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지켜주십시오. 당신의 정신이 놓여지는 곳을 청결하고 품격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입니다.
문화 구성원의 정체성
정체성은 자기동일성, 자기추체성, 자기완성, 주인의식, 자주성 등으로 표현됩니다. 나의 존재 이유, 나의 신체적/행동/능력의 특징과 가족/학교/사회/기타 공동체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한 확립과 조명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존재의식입니다. identity라고 하는 이 정체성은 동일함과 다름을 동시에 뜻하는 말입니다. 공동체라는 말은 닮은 무리인데, 이 가운데서 서로의 차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모두가 학생이라는 공통됨 속에서 자신이 남과 다른 차이를 발견하려는, 나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청소년기에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인간 자체에 대한 화두이기도 합니다.
문화와 정체성
문화는 이 정체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나라는 게임 문화가 없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놀이문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강제성이 따르게 됩니다. 놀이가 일과 다른 이유는 활동 자체가 즐거움과 만족을 가지고 있고,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놀이는 심신의 발달과 정신문화의 구축, 사회적 습관의 형성,스트레스의 해소, 기분의 전환, 피로회복, 생활의욕향상 등 많은 필수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발전기를 지난 우리나라는 노는 것은 곧 죄로 연결되었습니다. 풍요로운 여유를 갖지 못한 문화적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적없는 행위, 가시적 성과없는 행위가 모두 무의미로 연결되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환경은 놀이문화의 말살과 함께,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놀이문화의 발달은 곧 정신문화의 다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성적으로 대표되는 청소년기의 유일한 자기표현의 수치는 곧 청소년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자나요.라는 영화나 사회전반의 이 성적중심의 문화에 대해 비판하는 문화코드들은 이런 사회현상에 기인합니다.
정체성을 위해서는 표현이 필요합니다. 모든 이들은 이런 표현에 굶주려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자각하기 위해서는 나를 표현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끼를 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수용할 놀이 문화의 부재는 극단적인 몰림을 가져옵니다.
앞에서 정체성은 공통과 다름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놀이문화
우리나라에 노래방 붐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청소년용이라기보다 성인들의 정체성 확립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딱딱한 이유만은 아닙니다. 대체 어느 누가 정체성따위를 확보하러 노래방에 가겠습니까? 노래를 부르러 가죠. 정체성 이전에 놀 것 자체가 없었다는 말이 맞습니다. 놀 것도 없는 상태에서 등장한 노래방은 전 국토에 그 붐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즉 퍼포먼스가 이루어질 수 있는 코드를 모두 갖춘 노래방의 유행을 알고 있습니까? 가히 지금의 스타크래프트에 비할 만큼 폭발적이었습니다. 함께 무엇을 하는데 그 안에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것. 공통과 다름을 충족시키는 첫 물건은 노래방이었습니다.
DDR도 히트했습니다. 퍼포먼스. 나를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이 DDR과 PUMP 역시 대단한 붐이었습니다. 자기표현과 놀이문화가 발달한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리 붐을 일으키지 못했던 이 불판 위의 곰과 같은 놀이는 한국과 일본에서 엄청난 붐을 일으킵니다. 모두가 즐기는 공통점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이런 물건은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춤추고 싶다고 길에서 춤출 수 있는 곳이 아닌 이 땅에서 1평도 채 안되는 이 공간은 자신이 퍼포먼스를 펼치고 환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퍼포먼스의 대상이 나타납니다. 짐작하셨다시피 바로 스타크래프트입니다. 전세계 1위라는 최강의 퍼포먼스를 나타낼 수 있는 이 게임은 우리나라 게임문화와 인터넷산업과 하드웨어 시장을 한번에 끌어 엎어버린 그 힘은 사회 전체를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게임방. 인터넷, 프로게이머를 단숨에 대중화 시켜버렸습니다. 명실공히 스타크래프트 문화라고 부를만 합니다. 스타크래프트는 내가 공동체 안에 속해있음을 나타내는 코드임과 동시에 나의 우위와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자기 정체성 확립의 공간이었습니다. 물론 노래방과 마찬가지로 정체성따위의 이유로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이 스타를 하는 이유는 여전히도 함께 놀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이 나타납니다. 스타크래프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나라 게임계의 판도를 바꿔놓는 시장성을 가졌습니다. 자기 정체성의 확립. 나를 퍼포먼스함에 있어서 더이상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공평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평은 사전과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누구나 시간만 들이면 적당한 수준의 최고가 된다라는 이 노력은 능력의 격차를 없앴습니다. 스타는 죽어라해도 안되지만, 온라인 게임은 그 격차를 시간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돈이 있으면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게임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모든 현상들이 단순히 재미있어서 그냥 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이런 시각도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 아타나시아가 아타나시아 문화를 세우려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산업이 문화를 앞서면 비극이 탄생합니다. 자격을 갖지 않은 사람이 문화를 가지면 비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총기에 대한 자격을 갖추지 않은, 예를 들면 5살짜리 아이라던가 알콜중독자라던가... 하는 이들이 총을 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상상해보면 됩니다.
자동차 문화가 그랬습니다. 게임 문화도 예외는 아닙니다. 놀이에 대한 문화 자체가 없는 상태에서 컴퓨터 게임산업의 문화추월은 곧바로 저질문화로 이어집니다. 인터넷 문화도 인터넷 산업에 추월당하여 문화가 채 형성되기도 전에 산업에 의해 돈 낸 모든 사람에게 열렸습니다. 필자는 인터넷 문화의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법이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까?
공동체 문화와 왕따문화
동지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같은 문화 구성원은 서로를 돌보아야만 합니다. 아타나시아의 파티시스템에서 전투를 해본 사람들은 느꼈다시피 그것은 개인의 이득으로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말과 긍정적인 시야는 새로운 참여자를 진정한 동지로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안하무인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문화에 달하는 자격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배격과 설득이 문화를 지키는 힘이 됩니다. 누가 이야기합니다. 외국의 음악회에서는 핸드폰도 울리지 않고, 교통문화는 어떻고... 도서관에서 핸드폰이 울리지 않는 이유는 핸드폰이 울리면 일어나게 되는 사태 때문입니다. 주먹으로 때리거나 이런 종류의 폭력이 아닌, 문화에 자격미달이 의심되면 곧바로 ‘왕따’가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대접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섭게 보호되는 문화의 형성은 바른 문화의 형성으로 일어납니다. 간단한 논리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른 문화의 정체입니다.
대중에게 속한 문화는 더럽힐 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치우지 않을 때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 개념을 달리 할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내 책상은 어지럽히지 않으면 깨끗하지만, 거리는 치우지 않으면 지저분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누구도 버리지 않으면 깨끗하겠지만,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니마 안 쓰기 운동은 아타나시아 문화에 대한 자격을 주지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과 타인과 아타나시아의 동지를 구분하는 하나의 키워드인 것입니다. 문화가 깨끗해질 때 그 문화의 구성원 역시 풍요로워집니다.
왕따 문화라니 말이 꽤나 쌀쌀맞아보이지만, 다릅니다. 그 바탕은 같은 구성원에 대한 친절이며 하나의 공동체에 끌어 들이기 위한 사려 깊은 배려입니다. 본인이 배우고 고치고자 한다면 자격미달이란 말은 문제가 안됩니다. 하지만 안하무인으로 질서를 깨뜨리고, 무례한 행동과 저급한 언행으로 행동한다면 그에 대한 마땅한 대접이 필요합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대접 받을 자격이 없으면 대접해주지 않는 것.
선민의식과 우월성의 과시는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누구도 선민도 아니고 우월하지 도 않습니다. 문화의 구성원이 어떤 이유로든 우월할 필요나 우월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문화 자체가 유지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게임에서의 문화 형성이란 우리 사회 전반을 보건데 정말 요원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적어도 시도는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니마 안쓰기를 권하실 때에는 친절하고 정중해야 합니다. 대부분 게임 내에 처음 들어오는 분들입니다. 자신들끼리 사적으로 쓰는 대화는 가급적 끼어들지 마시고, 무언가 물어보기 위해 불특정 단수/다수를 부르는 님아, 님들아를 듣게 되시면 먼저 상대의 어려움을 해소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도 니마 안쓰기를 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화중 다시 님아가 언급된다면 가볍게 그점에 대해 주의를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친절하게요.
국어문법을 맞춰야한다면 님은 독립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임이 오시기에의 임과는 다른 말입니다.) 하지만 운동은 좀 더 현실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례를 범하는 것과 문법적으로 잘못된 사용은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요.
님아 님들아에서 ‘아’만 빼주시길 권하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아타나시아 님아 안쓰기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며,
둘째는 반말인 ‘아’라고 나를 부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것입니다.
선택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사적인 부분에까지 수정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님아 님들아는 분명 혼자서 쓰는 말은 아닙니다. 상대가 있을 때 사용되는 방법이죠.
그 상대가 자신을 다르게 불러주길 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히 호칭을 바꿀 것입니다. 호칭이란 상대를 부르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때 분명 상대의 긍정적 반응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편하죠. ‘님아’보다는 한자가 더 적고요.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다’라는 입장이라면 당신을 ‘야!’라고 부른 것과 동등하게 취급하시면 됩니다. 아와 야는 같은 말이니까요. 앞에 붙는 말에 받침이 있냐 없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아타나시아는 그 어떤 게임보다 그 문화를 지키고 유지시키려는 이들이 많은 게임입니다. 물론 신선의 세계는 아닙니다만, 그 색깔은 분명 ‘맑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기대를 걸고 동참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신이 바라던 게임 세상을 위해서.
아타나시아 니마 안 쓰기 운동에 참여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두서 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제기되는 주장들
1.니마는 우리 고유의 표현이다.
-> 그런 주장이 있습니다. 정신세계사에서 출간된 정호완 저 우리말의 상상력이라는 책 56쪽-59쪽에서는 단군의 아버지 신이자 하늘과 불의신 니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남성성과 하늘,불을 상징하는 이 니마는 이마라는 머리 앞부분을 나타내는 명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이마는 일어로 히타이인데 이 히는 해, 타이는 흙을 둥글게 쌓아 제단을 만든 것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님의 어원이 되었고, 땅과 물의 신이자 여성성의 상징으로 단군의 어머니상을 나타내는 고마라는 단어와 함께 (고맙다=고마워 같은 사람이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니마고마. 즉 임금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는 주장을 합니다.즉 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대에 대한 호칭을 태양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우리의 관습으로 인본주의의 절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통신에서 쓰이는 니마는 그 어원이 틀립니다. 같은 책 27쪽에서 저자는 언어를 문화의 전신으로 규정하고, 언어는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사회적 약속이라고 규정합니다. 또 그 개인에게 상당한 강제성을 규정한다고 하여 언어의 중요성과 불변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습니다. 공감대를 유지하는 언어공동체의 속에서 동일발음을 근거로 잘못된 것에 대한 주장은 옳지 못합니다.
2.언어는 바뀌는 것이다.
-> 하지만 언어는 사회적 약속입니다. 물론 사회의 규범이 변함에 따라 언어는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는 비록 공동체에 의하여 만들어지지만, 일단 만들어진 말은 사회적 약속이 됩니다. 약속들을 배우는 데는 마땅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약속들을 배우지도 않은 채 언어의 변이를 주장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이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회구성원의 권리를 주장하는 어불성설입니다. 교통신호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모든 이들이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면 빨간 불이 진행신호가 될 수도 있다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두 말, 즉 교통신호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과, 모든 이들이 빨간 불에 통행을 하면 빨간 불이 통행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둘 다 사실이지만, 이 주장이 빨간 불에 길을 건너는 것에 대한 정당함을 주장하지는 못합니다.
3.언어를 쓰기 위해 모두 언어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 하지만 말은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한국에서 대충 몇 년 산 외국인과 그 수준이 다를 바가 없다면 언어의 주체라고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언어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규정할 정도로 커다란 사회적 약속입니다. 그것도 법률과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광범위하고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약속인 것입니다. 준법시민이 되기 위해 모두가 법률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그런 법이 있는 줄 몰랐다가 정상참작은 될지는 몰라도 무죄의 요소는 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법이라면 마땅히 바뀌겠지만, 이런 경우를 모두에 적용하는 것은 특이한 경우를 일반화하는 특이성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 특이성 일반화의 오류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언어에 대한 약속은 중학교 상급과정에서 거의 완료됩니다. 또 자주 언급되는 통신상의 대부분의 실수 혹은 잘못들은 초등학교 상급과정에서 완료되는 것들입니다. 언어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의무교육을 받았다면 받은 만큼에서 상위성적은 아니더라도 배운 것을 적절히 알아야 하고, 또 모른다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4.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 자유의 기본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게임에서의 자유도란 이웃집의 창문을 부술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위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했던 자유가 인간이 자유롭게 안드로메다를 왔다갔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만큼이나 자유의 의미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문화공동체 안에서의 자유는 문화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방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자격에 미달하는 것입니다. 규범이나 규율을 무시하고 절제함이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상태가 자유는 아니고, 또 그것에 규범과 규율을 제시하는 것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아닙니다.
5.통신어의 순기능을 무시한 행위이다.
-> 통신어 자체는 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그 순기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니마는 이 규범에 어긋나는 통신어로 규정하고 그것을 막는 것입니다. 실제 비존칭어 내지는 빈정거림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용어의 사용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앞서 말한대로, 바른 표현을 쓸 수 있는 상태에서 통신어를 구사하는 것은 의도적 변화사용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될 소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른 표현을 쓰지 못하는 불구적 상태는 문제가 됩니다. 사회구성원간의 약속을 모른다는 것은 해당 부분에 있어서 사회 구성원으로 대접 받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교통신호를 모르는 이가 어떻게 거리에 차를 몰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6.난 니마가 더 정감 있다고 생각한다.
-> 호칭의 존칭은 듣는 이를 위한 배려입니다. 단순히 어떤 부류가 그 말을 듣는데 아무런 불쾌한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이 단순히 잘못된 용어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일부 청소년 사이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는 일이 너 짱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해서, 그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닙니다.
7.놈이나 니마는 욕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욕에 정감이 실려있다.
-> 어떤 놈이 그딴 소릴 합니까?
8.더 추가될 다른 주장이나 질문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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