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부자동네... |
한남·성북·청담동에 부자들이 모여 사는 까닭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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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삼성가와 농심가 사이에 벌어진 ‘한강 조망권’ 분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부자들의 거주 지역과 주거 환경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두 집안의 저택이 자리한 곳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남동은 소문난 부자동네다. 2004년 8월 한 언론사가 개인 시가총액 기준 상위 100명의 거주지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한남동은 단연 ‘부촌 중의 부촌’으로 확인됐다. 100명 중 20명, 특히 최상위 부자 10명 중 7명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성북구 성북1동(14명), 강남구 청담동(10명), 강남구 압구정동(5명)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 지역은 왜 부자들의 동네가 됐고, 부자들은 왜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가.
한남동... 손꼽히는 재벌들 “우리는 이웃사촌”
남산 기슭에 솟아 있는 그랜드 하얏트 호텔 후문 바로 아래부터 한남대로 건너편 단국대 근처까지 넓게 퍼져 있는 주택가가 바로 거부(巨富)들의 동네 ‘한남동’이다. 일부 지역은 행정구역상 이태원동으로 분류되지만, 통상 그저 한남동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이건희 삼성 회장, 구본무 LG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 등 국내 3개 그룹 총수는 물론이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 오너들이 모여 살고 있다.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서경배 태평양 회장 등이 한남동 이웃사촌.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 구자학 아워홈그룹 회장(이건희 회장의 누나인 이숙희 씨 남편) 등 삼성가 사람들의 상당수도 이 일대에 산다.
이들의 저택은 대부분 골목 한두 개를 사이에 두고 바로 이웃해 있다. 박성용 금호 명예회장의 집에 잇대어 구본무 LG 회장이 새 집을 짓고 있고, 박 명예회장의 집 현관에서 왼쪽으로 꺾어 50m만 들어가면 이건희 회장의 여동생이자 신세계그룹 총수인 이명희 회장 집이 나오며, 이 집과 현관을 마주하는 집이 이명희 회장 외아들인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의 집인 식이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집도 여기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저택들은 하나같이 3~4m 높이의 거대한 벽과 수십 개의 CCTV(감시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어 누가 사는지, 내부는 어떻게 생겼는지 도통 알아볼 수 없게 돼 있다. 사생활만큼은 철저히 보호되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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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에 모여 사는 재벌들의 특징은 1960~70년대 개발 시대에 성장한 부자들이라는 점이다. 군사정권 시절 군 출신 엘리트들이 과거 육군 본부가 있던 용산을 중심으로 모여 산 것이 그 시발점이 됐다. ‘권력’의 곁에는 ‘돈’이 머무는 법. 서울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며, 주요 공관과 외국 대사관 등이 밀집해 있어 안전이 다른 지역보다 뛰어나다는 점도 재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사실 한남동은 부촌이기에 앞서 외교 1번지다. 수시로 외교 사절들의 파티가 열리는 외교통상부 장관 공관이 자리잡고 있고, 30여개 나라의 대사관 및 영사관이 이어져 있다. 외교통상부 장관 공관 옆에는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연합사 부사령관, 해병대사령관 공관이 있다. 1979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가 12·12쿠데타를 일으킨 뒤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곳이 바로 육참총장 공관이었다. 국회의장 공관이 있는 곳도 한남동이다.
한남동이 역사적인 이유만으로 부촌이 된 것은 아니다. 이 인근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빼어난 명당이라 한다. 대동풍수지리학회 고제희 이사장에 따르면 한남동은 기가 순한 곳이라 사람이 대를 이어 살 만한 터. 고 이사장은 “한남동이 부촌이 된 데는 한강 물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설명한다. 한강은 멀리 태백산 물이 흘러 내려온 것인데, 중랑천을 만난 후 ‘금성수’라는 물이 되어 한남동을 둥글게 감싼다는 것. 최근 삼성과 농심 사이의 분쟁에서도 농심 측을 가장 분노케 한 것은 삼성가의 새집이 한강 조망권을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한다. ‘물을 막은 것은 곧 재물을 막은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한 반발을 불러온 이유인지도 모른다.
한남동 재벌촌 일대를 돌아본 풍수지리 전문가 우석대 김두규 교수는 “북한산에서 서남진한 강한 용맥은 남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이어지는데, 이 혈이 강하게 흐르며 응집되는 장소가 바로 승지원(고 이병철 회장의 저택이며, 지금은 삼성의 영빈관으로 쓰이는 건물) 자리”라며 “승지원과 농심가, 삼성 이건희 회장의 새집으로 이어지는 지역이 한남동 일대에서 가장 풍수가 좋은 명당”이라고 지적했다. 구본무 회장의 새집 터는 “승지원으로 흐르는 맥보다는 다소 작지만 또 하나의 맥이 응집되는 자리”라 한다.
건설교통부가 1월14일 표준 단독주택 가격을 공시한 바에 따르면, 전국 표준주택 중 최고가는 한남동 유엔빌리지의 한 단독주택으로 공시가 27억2000만원. 그러나 이것이 최고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03년 4월 LG전자가 특수 관계인인 구본무 회장에게 한남동 토지를 41억원에 매도했다고 공시한 것에 비추어 이 일대 집값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한남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사장은 “대지만 평당 2000만원을 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우리를 거쳐 가는 것이 없으니 추정치일 뿐”이라며 “임대 주택들을 보면 관리비만 월 1000만원이 넘게 들고, 월세도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성북동... 재벌 1세대·유명 예술인·교수들 많아
성북동, 좁혀 말해 성북2동에 위치한 고급 주택가는 한남동과 마찬가지로 ‘별천지’다. 일단, 웬만해서는 거기까지 들어가 볼 일이 없다. 극장도, 쇼핑가도, 이름난 맛집이나 학교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대저택뿐이다. 길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이들의 상당수는 사설 경비업체나 관리사무소 직원, 저택의 가사 도우미들이다. 길가에 주차해 있는 국산 중소형 승용차들은 대부분 이들이 출퇴근 때 이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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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은 오래전부터 ‘한국의 베벌리힐스’로 불려왔다. 가파른 언덕배기에 명사들의 대저택이 꼬리를 물고 늘어선 때문이다. 그러한 ‘명성’에 걸맞게 성북2동은 서울 평균 동 면적의 3배 가까운 넓이지만, 주민은 450여 가구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저택이 한꺼번에 두 집을 사진 앵글에 담기 힘들 만큼 장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2001년 12월 미디어에퀴터블이 보유주식 평가액 50억원 이상인 700명의 대주주 주소지를 조사한 결과, 성북동(52명)에 가장 많은 대주주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 뒤를 잇는 곳이 한남동(35명)이었다. 요컨대 최상위 부자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하면 한남동이 ‘1등’이지만, 그 범위를 700명으로까지 넓히면 성북동이 ‘1등’인 셈이다.
성북동은 말 그대로 도성 밖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뛰어난 풍광으로 조선시대 때는 선비들이 음풍농월하던 최고의 은거 수양처였다. 그런 성북동이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된 시초는 60년대, 청와대와 가까운 이곳에 권력 실세들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어 7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대기업 총수 등 부잣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 기업이 소유한 영빈관은 정·재계 고위 인사들의 고급 사교장으로 활용됐다.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자주 활용했던 현대 영빈관이며 LG전자의 ‘연곡원’, 포스코의 ‘영광원’ 등이 이곳에 자리해 있다.
북악 스카이웨이 가는 길에 있는 레스토랑 ‘곰의 집’은 37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넓은 터와 뛰어난 전망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20여년을 근무했다는 한 종업원은 “동네의 유명 인사들이 자주 찾는다. 30년 넘는 단골들이 많다. 고객 연령은 대부분이 50, 60대로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이곳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성북동의 풍수에 대해 고제희 이사장은 “서울 성곽이 있는 남쪽 능선이 마을의 ‘백호’가 되고, 정릉동과 경계를 이루며 동남진으로 뻗은 북악 스카이웨이 능선이 ‘청룡’이 돼 부지를 감싸는 형상”이라 설명한다.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명당, 그러니까 ‘밝은 달빛 아래 비단을 펼쳐 놓은 형세’로 높은 벼슬아치나 부자들이 살 만한 땅이라는 것. 또 성북동은 ‘택리지’가 ‘마을이 들어설 지리적 조건이 뛰어난 곳’으로 소개한 지역이기도 하다. 실제로 성북동은 풍광이 수려하고 환경이 쾌적할 뿐 아니라 시내와도 가까워 도심 속 주거지역으로는 최상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탁월하다.
성북동에는 크게 4개의 고급 주택단지가 있다. 대교단지, 성락원 마을, 꿩의 바다 마을, 학의 바다 마을 등이다. 꿩이니 학이니 하는 단어가 쓰인 것은 60년대만 해도 이곳에 새가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중 최고급지는 대교단지다. 외곽도로를 따라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구두회 LG 창업고문,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 집이 죽 늘어서 있다. 성락원 마을은 사적 제378호로 지정된 성락원을 중심으로 조성돼 있다. 성락원은 거의 원형으로 보존된 전통 사저다. 입구에 들어서면 계곡을 타고 맑은 물이 흐른다. 이는 성북동이 원래 물이 흐르던 골짜기였음을 알게 한다. 지금도 성북2동 동사무소 앞 버스정류장의 이름은 ‘쌍다리’다. 복개 전 개울을 가로질러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던 곳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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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성북동 부촌에 사는 재벌 1세대 및 중견기업인은 100여명에 달한다. 앞서 언급한 이들 외에도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김각중 경방 회장, 임충헌 한국화장품 회장, 박승주 건영식품 회장,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김영준 성신양회그룹 회장,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윤덕병 한국야쿠르트 회장, 이병무 아세아그룹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등이 이곳 주민이다. 유명 예술인이나 교수들도 다수 거주하고 있다.
또한 성북동에는 22곳의 대사관저가 있다. 70년대 독일대사관이 가장 먼저 땅을 사 들어왔다. 독일대사관저는 2만2140평이라는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일본 대사관저(2000평)가 그 뒤를 잇는다. 동네에 산재한 빌라의 주요 임대자 또한 외국인들이다.
2004년 9월, 성북동 주민들은 스스로 방범용 폐쇄회로 카메라(CCTV)를 설치했다. 카메라 27대를 설치하는 데 든 비용 1억6500여만원은 250가구가 70만원씩 나눠 내 마련했다. 덕분에 성북동을 드나드는 차와 사람의 움직임을 100%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이전부터도 성북동 주민들은 사생활 보호와 안전에 만전을 기해왔다. 집집마다 설치한 무인경비시스템과 4개 주택단지 어귀마다 있는 사설 관리사무소가 대표적이다. 그중 한 관리소에서 일하는 A씨는 “단지 내 각 가정에서 매달 얼마씩 내는 돈으로 운영한다. 3교대로 야간 순찰도 돌고, 눈 치우기, 간단한 보수 작업도 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리원은 “오랜 세월 이 동네에서 일했지만 집주인들의 얼굴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집안일은 모두 가사 도우미와 운전기사, 집사들이 처리한다. 그저 짙게 선팅된 차들의 번호판을 보며 ‘어디 사모님 나들이 가시는군’ 하고 짐작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성북동 담이 왜 높겠나.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반상회 때문에 얼굴이나 봤을까, 주민들 간에도지금은 별 교류가 없는 걸로 안다”고 덧붙였다.
성북동 부자들의 씀씀이는 어떨까. 한 고급 빌라 경비원은 “한마디로 굉장히 짜다. 돈 잘 쓰는 건 웬만한 중·상류층 사람들이지, 성북동 부자들은 작은 돈에도 벌벌 떤다”고 했다. 동네 아래쪽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B씨는 “큰돈은 잘 쓰면서도, 작은 돈에는 연연해하는 것 같더라. 예전에는 명절 때가 되면 관리원들에게 선물도 전달하고 했는데 요즘은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성북동에는 전통의 부자동네답게 고택과 미술관, 사적지 등이 많이 있다. ‘국내 최고의 사립미술관’으로 손꼽히는 간송미술관이 대표적.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변모한 삼청각, 지방민속자료로 지정된 이재준가(제10호), 상허 이태준 고택(제11호),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도 있다. 성북동의 부동산 가격은 평당 800만~1000만원 선. 사려는 사람은 있으나 내놓은 물건이 없어 6개월에 한 건 정도 거래되는 수준이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라 흥정은 거의 없다. 오리엔트 공인중개사무소 최원효 사장은 “200평 미만 주택 매매가가 25억원 정도다. 효성빌라, 성락원하이츠, 성북빌 등 90~100평대의 고급 빌라는 15억~20원을 호가한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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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창업 2, 3세대, 벤처갑부, 연예인들 상당수 거주
청담동은 80년대 이후 화려하게 개막한 ‘강남 시대’를 대표하는 동네다. 우리나라 100대 주식 부자 중 10명이 이곳에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재벌가의 경우 창업 2세대나 3세대, 90년대 말 이후 부상한 정보기술기업 창업자 등이 이에 속한다. 구본준 LG필립스LCD 부회장, 박병엽 팬택계열 부회장, 우석형 신도리코 회장,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등이 대표 부자다.
청담동은 이름 그대로 맑은 강과 연못이 있는 동네였다. 전형적인 강촌 마을이던 곳이 73년 영동대교가 놓이고 75년 이후 강남에 건축 붐이 일면서 급속도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청담동이 ‘부촌’으로 급부상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은 경기고 이전과 영동고 신설, 갤러리아백화점의 입점이었다. 학군과 생활 편의시설에서 ‘최고’ 혹은 ‘최고급’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동대교 남단 한강변은 청담1동, 갤러리아백화점 건너편 명품 숍 거리 뒤쪽은 청담2동이다. 청담1동은 강변으로 늘어선 아파트들 뒤로 고급 빌라와 상업지구가 뒤엉켜 있는 모양새다. 청담2동의 경우 7, 8년 전까지만 해도 고급 빌라가 대종을 이루는 전형적 주택가였지만 지금은 많이 변했다. 명품 숍 뒤에서 도산대로까지 이른바 ‘청담동 문화’의 근간이라 할 만한 화랑, 퓨전 레스토랑, 카페 등이 속속 들어선 것이다. 요즘도 주택이나 빌라를 상업건물로 바꾸는 재건축 또는 리모델링 공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중심부에 이니그마빌, 효성빌라 등 고급 빌라들이 자리해 있다. 20억원을 호가하는 ‘강남 고급 빌라의 자존심’이라 할 만하다. 청담2동사무소의 한 직원은 “같은 청담2동이라도 도로(도산대로) 하나 건너편인 남쪽은 ‘강남 서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연립주택이 모여 있어서 분위기가 확 다르다. 주민들의 평균 소득 수준을 보면 오히려 압구정동이 청담동을 앞설 것”이라고 말했다.
‘청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명품’이다. 샤넬, 구찌, 조르지오 알마니 등 유명 브랜드 숍과 외제 차들이 늘어선 거리를 걷다 보면 도도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에 절로 젖게 된다. 청담동 주민으로 지역 화랑에 근무하는 정모 씨 또한 “음식이든 물건이든 문화든 최고의 것을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점”을 청담동 거주의 최대 장점으로 꼽았다.
청담동은 창업세대 기업인이나 고급 관료들이 많이 사는 동네는 아니다. 부촌으로서의 역사가 워낙 짧은 데다, ‘대한민국 소비문화 1번지’라는 이미지가 강한 때문이다. 오히려 청담동 명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연예인들이다. 조영남, 강부자, 박상원, 이미숙, 김민종, 채시라, 손지창, 차인표 씨 등이 이에 속한다. 연예인들이 운영하는 카페, 레스토랑, 실내포장마차도 수십 곳에 이른다. 연예기획사와 명품 숍, 최고급 미용실까지 늘어서 있다 보니 청담동에서 연예인을 보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다. 때문에 청담동 주민들은 눈앞에 유명 연예인이 지나가도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는 또한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청담동 주민의 또 한 축은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맡고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화려한 학력을 자랑하는 이들은 청담동의 ‘늘 새롭고 세련된 문화’를 이끄는 핵심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또 늘어가는 청담동의 와인 바, 퓨전 레스토랑, 재즈 카페 등을 운영하는 이들도 대부분 이들이다. 90년대 초반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오렌지족’들이 자라 청담동 ‘여피족(도시에 사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 내지는 ‘보보스족(보헤미안의 자유와 낭만, 부르주아의 돈과 지위를 가진 디지털 시대 엘리트)’이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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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주부들이 즐겨 찾는 도자기 갤러리 ‘우리그릇 려’의 관계자는 “청담동 고객들은 양산품과 다른 고급스럽고 개성적인 디자인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 하지만 취향이 워낙 자주 바뀌어 딱히 무엇이 유행이라 말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또 “청담동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그 하나인 듯하다”면서 “그런 변화를 일종의 오락으로 여기고 직접 뛰어들어 즐기는 것이 청담동 문화”라고 덧붙였다.
패션사진작가이자 디자인 스튜디오 ‘도프앤컴퍼니’ 대표인 김용호 씨는 청담동 여피문화의 터줏대감 격이다. 97년 그가 조용한 주택가이던 청담2동에 프랑스식 카페 ‘카페 드 플로라’를 열면서 오늘날 청담동 소비문화의 뿌리가 만들어졌다. 김씨는 “7, 8년 전만 해도 이곳 주민들은 상업공간이 동네 분위기를 흐린다며 상당히 싫어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집값, 임대료가 몇 배씩 뛰어오르자 나중에는 큰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신 그들 중 상당수가 집을 팔거나 임대를 하고 딴 지역으로 이사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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