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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빛나는 세계적인 수학자들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1. 21. 15:03
 

유명한 수학자

 

가르베르스(1898.5.16)

독일의 수학자 및 자연과학자. 1937~38년 베를린 의학사 자연사연구소 연구원이었고, 41~46년 라이프치히대학 강사를 거쳐, 47년 함부르크대학 강사가 되었다. 특히 이슬람교의 자연과학에 정통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Ein Werk Tabit bin Qurra’s 웑er ebene Sonnenuhren》(1936) 등의 역주(譯註)가 있다.

 

가생디(1592.1.22~1655.10.24)

프랑스의 철학자·물리학자·수학자. 프로방스 출생. 에크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 이 대학의 신학·철학 교수가 되었으나, 자연과학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교수직을 사임하고, 1645년에 파리의 콜레주 루아얄의 수학교수가 되었다. 최초의 역작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대한 역설적 연구》(24)에서 명백히 밝힌 바와 같이, 사상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 제파(諸派)에 대해 격렬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방면의 활약에서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기조로 하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적 원자론(唯物論的原子論)에 입각하여 물질과 독립된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논증하고, 이의 불멸(不滅)을 주장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경험 지식을 모든 인식의 원천이라고 선언하여 R.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형이상학적 개념에 반대하였다. 그가 주장한 원자론은 18세기 프랑스 계몽기의 감각론자(感覺論者)나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에게 큰 영향을 줌으로써 근대원자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과학자로서는 천체의 관측과 지중해의 수로도(水路圖)작성에 업적을 남겼다.

 

갈루아(1811.10.25~1832.5.31)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교외 부르라렌 출생. 군(群)의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하였고, ‘갈루아의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파리의 고등이공과학교에 입학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82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30년 정치운동에 참가해서 퇴학당하였다. 또한 국왕을 탄핵하여 투옥되었는데, 가출옥 중에 경찰관이 도발한 것이라고도 하는 결투로 인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방정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도 프랑스 학사원에서 등한시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결투 전날 밤에 친구인 A.슈발리에에게 보낸 유고(遺稿)에서 비로소 그 위대성이 알려졌다. 유고에는 타원적분(楕圓積分)과 대수함수(代數函數)의 적분에 관한 것, 방정식론에 관한 것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군(群)의 개념 도입이나 갈루아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갈루아의 사상에 포함된 군의 개념은 기하학이나 결정학(結晶學)에도 응용되었고, 물리학에도 풍부한 연구수단을 제공하였다.

 

가우스(1777.4.30~1855.2.23)

독일의 수학자. 대수학·해석학·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진다.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한편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電磁氣學)·천체역학(天體力學)·중력론(重力論)·측지학(測地學) 등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브룬스비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빈궁한 가운데 성장하였지만, 일찍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숙부의 노력으로 취학할 수 있었다. 10세 때 등차급수의 합의 공식을 창안하는 등 신동(神童)으로 알려져 브룬스비크공(公) 페르디난드에게 추천되어, 카롤링고교를 거쳐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였다. 고교시절에 이미 정수론(整數論)·최소제곱법[最小自乘法] 등으로 독자적인 수학적 업적을 올렸는데, 괴팅겐대학 재학 시절에 정 17각형의 문제에 열중한 것이 수학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가우스는 헬름슈테트대학으로 옮겨 22세 때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다시 브룬스비크로 돌아와 페르디난드공(公)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학을 계속 연구하였다. 1801년에 간행된 명저(名著) 《정수론연구(整數論硏究):Disquistiones arithmeticae》는 2차의 상호법칙의 증명을 풀이하였으며, 합동식(合同式)의 대수적 기법을 도입하여 이 분야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아 올렸고, 학위 논문에서 이룩한 대수학의 기본정리의 증명과 더불어 학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에서의 지위를 가져다준 것은 오히려 천체역학에 관한 업적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학계에서 뉴턴역학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1801년 소행성 케레스(Ceres)가 발견되자, 이 별의 궤도결정이 문제로 대두되어, 가우스가 이를 계산해 내어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1807년에 괴팅겐대학 교수 겸 천문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800년 이후 가우스의 연구는 대략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소행성의 궤도결정을 시작으로 천체역학을 연구하던 20년까지의 시기이고, 이 시기의 연구는 《천체운동론》(1809)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수학 분야에서는 초기하급수(超幾何級數)의 연구 및 복소변수(複素變數)의 함수론의 전개가 있다(베셀에게 보낸 서한에 적혀 있으며, 훗날의 코시의 정리도 포함한다). 제2기는 측지학(測地學)에 관계한 시기로서, 21년에 하노버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사업의 학술고문으로 위촉받은 일이 계기가 되어 곡면론(曲面論)의 검토, 즉 곡률(曲率)의 문제, 등각사상(等角寫像)의 이론, 그리고 곡면의 전개가능성 등을 고찰하였다. 이것은 미분기하학(微分幾何學)으로 향하는 최초의 일보였다. 한편, 정수론의 영역에서도, 주로 4차(次)의 상호법칙 연구에서 비롯하여 복소정수(複素整數)의 연구에 이르러 대수적(代數的) 정수의 이론을 창시하였고, 이것은 아이젠슈타인, 쿠머, 데데킨트 등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데이터의 처리와 관련하여 21∼23년의 논문에서 최소제곱법을 이론화하여 통계에서 가우스분포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제3기는 30년부터의 10년간으로서, 주요 관심사는 물리학 쪽으로 옮겨져 갔다. 특히, W.E.베버와의 협력 아래 추진한 지구자기(地球磁氣)의 측정 및 이의 이론적 체계화가 두드러진 업적이다. 괴팅겐에 자기관측소를 설립하고, 측정을 위하여 자기기록계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절대단위계(絶對單位系)를 도입함으로써 전자기학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하였고, 한편으로는 퍼텐셜론(論)을 전개하여 이것의 수학적 기초의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 밖에, 전신기(電信機)의 발명과 모세관현상의 연구 등도 이 시기에 이룩한 것이다. 40년경부터 만년에 이르는 제4기에는, 오늘날의 위상해석학(位相解析學)인 위치해석학 및 복소변수의 함수와 관련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이상과 같이 수학자이며 동시에 관측자이기도 했던 그는 ‘괴팅겐의 거인(巨人)’으로서 이름을 남겼지만, 우선권 다툼이라든지 후진의 업적에 대한 냉담한 태도 등으로 가끔 나쁜 평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완전성을 중요하게 여긴 그의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좌우명은 “수(數)는 적으나 완숙하였도다”였다.

 

갈루아(1811.10.25~1832.5.31)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교외 부르라렌 출생. 군(群)의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하였고, ‘갈루아의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파리의 고등이공과학교에 입학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82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30년 정치운동에 참가해서 퇴학당하였다. 또한 국왕을 탄핵하여 투옥되었는데, 가출옥 중에 경찰관이 도발한 것이라고도 하는 결투로 인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방정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도 프랑스 학사원에서 등한시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결투 전날 밤에 친구인 A.슈발리에에게 보낸 유고(遺稿)에서 비로소 그 위대성이 알려졌다. 유고에는 타원적분(楕圓積分)과 대수함수(代數函數)의 적분에 관한 것, 방정식론에 관한 것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군(群)의 개념 도입이나 갈루아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갈루아의 사상에 포함된 군의 개념은 기하학이나 결정학(結晶學)에도 응용되었고, 물리학에도 풍부한 연구수단을 제공하였다.

 

갈릴레이(1564.2.15~1642.1.8)

이탈리아의 천문학자·물리학자·수학자. 피사 출생. 피렌체의 시민계급 출신이다. 성과 이름이 비슷한 이유는 장남에게는 성을 겹쳐 쓰는 토스카나 지방의 풍습 때문이다. 1579년 피렌체 교외의 바론브로사수도원 부속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는데, 이 무렵 우연히 성당에 걸려 있는 램프가 혼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振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84년 피사대학을 중퇴하고 피렌체에 있던 가족과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아버지 친구이자 토스카나 궁정수학자인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면서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이때 습작(習作)으로 쓴 논문이 인정을 받아 92년 피사대학의 수학강사가 되었고, 같은 해 베네치아의 파도바대학으로 옮겼다. 파도바대학에서는 유클리드기하학과, 천동설(天動說)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리치에게 배운 응용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단한 군사기술 입문》 《천구론(天球論) 또는 우주지(宇宙誌)》 《축성론(築城論)》 《기계학》은 이 시기의 저서이다. 베네치아의 여성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파오로 사르피 같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귀족 등과 친교를 맺었다. 1604년의 《가속도운동에 관해서》에서 발표한 근대적인 관성법칙(慣性法則)의 개념도 이미 그 전에 사르피에게 보낸 서한에 나타나 있다. 1609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망원경을 만들어 여러 천체에 대하여 획기적인 관측을 하였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완전한 구(球)로 믿었던 달에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목성(木星)도 그것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10년에 이러한 관측결과를 《별세계의 보고》로 발표하여 커다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해에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서 토스카나대공(大公)인 메디치가(家)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 후로도 천문관측을 계속하여 12∼13년에 태양흑점 발견자의 명예와 그 실체의 구명(究明)을 둘러싸고, 예수회 수도사인 크리스토퍼 샤이너와 논쟁을 벌여, 그 내용을 《태양흑점에 관한 서한》에서 발표하였다. 이 무렵부터 갈릴레이는 자신의 천문관측 결과에 의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데, 이것이 로마교황청의 반발을 사기 시작하였다. 성서와 지동설과의 모순성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대공(大公)의 어머니에게 편지형식으로 자기의 생각를 써 보냈는데, 이로 말미암아 로마의 이단심문소로부터 직접 소환되지는 않았지만 재판이 열려, 앞으로 지동설은 일체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제1차 재판). 18년에 3개의 혜성이 나타나자 그 본성(本性)을 둘러싸고 벌어진 심한 논쟁에 휘말리는데, 그 경과를 《황금계량자(黃金計量者)》라는 책으로 23년에 발표하였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지동설과 천동설의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천동설을 주장하는 측의 방법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하였으며, 우주는 수학문자(數學文字)로 쓰인 책이라는 유명한 말을 함으로써 자기의 수량적(數量的)인 자연과학관을 대담하게 내세웠다. 그 후 숙원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Dia1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의 집필에 힘써, 제1차 재판의 경고에 저촉되지 않는 형식으로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32년 2월에 발간되었지만, 7월에 교황청에 의해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올랐으며, 갈릴레이는 로마의 이단심문소의 명령으로 33년 l월에 로마로 소환되었다. 4월부터 심문관으로부터 몇 차례의 신문을 받고, 몇 가지 위법행위가 있었음을 자인하였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심문소 당국이 증거로 제시한 서류 중 몇 가지는 그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6월에 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 앞으로는 절대로 이단행위를 않겠다고 서약하였다(제2차 재판). 그 뒤 갈릴레이는 피렌체 교외의 알체토리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는데, 사랑하는 장녀와 시력마저 잃었지만 마지막 대작인 《두 개의 신과학(新科學)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Discorsi e dimonstrazioni math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attenenti alla meccanica》의 저술에 힘썼으며, 일단 정리되자 신교국(新敎國)인 네덜란드에서 출판하였다. 이어 속편 집필에 착수하였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는 공적(公的)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묘소를 마련하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만년에는, 스승의 전기를 쓴 V.비비아니와, 기압계(氣壓計)에 그 이름을 남긴 물리학자 토리첼리의 두 제자가 그의 신변에 있었다. 갈릴레이의 생애는 르네상스기와 근대와의 과도기에 해당되며, 구시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그의 생활이나 과학 속에도 공존하고 있었다. 천문학에서는 지동설을 취하면서도 케플러의 업적은 전혀 이해하지 않았고, 물리학에서의 관성법칙을 발견했지만 이것의 정식화(定式化)는 데카르트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자유가 주어지는 파도바대학을 떠나 봉건제후(封建諸侯)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간다운 면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뛰어난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골즈브로(1881.5.19~1963.5.26)

영국의 해양학자·수학자. 더럼대학 수학교수(1928∼48), 이학부장(34∼36), 문학부장(36∼38)을 역임하였다. 동력학적 조석론(潮汐論), 증발(蒸發) 및 강우(降雨)의 불균일로 인한 해류 등의 이론적 연구가 있다.

 

괴델(1906.4.28~1978.1.14)

미국의 수학자·논리학자. 오스트리아 출생. 빈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후, 동대학 강사(1933∼38)로 있었다. 그 동안 과학적 방법 위에 철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한 빈 학파에 속하여, 그 후 수학기초론이나 논리학의 방법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많은 ‘괴델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1931년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인데, 이것은 당시의 H.힐베르트나 B.러셀과 같이 공리적인 방법에만 의존하여 수학의 체계를 세우려는 확신을 좌절시킨 정리이다. 38년 나치스 정권의 박해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연구원이 되었다. 주요 저서 논문으로는 《냕er formale unentscheidbare S둻ze der Principia Mathematica und verwandter Systeme》(1931) 《The Consistency of the Axiom of the Choice and of the Generalized Continuum-Hypothesis with the Axioms of Set Theory》(48) 등이 있다.

 

구르사(1858.5.21~1936.11.25)

프랑스의 수학자. 랑자크 출생. 툴루즈 이과대학 강사(1881∼85), 파리 이공과대학 연습교사(96 이래), 소르본대학의 미·적분학 교수(97)를 지냈다. 함수론·미분방정식론·불변식론(不變式論)·곡면론 등 분야에 대한 공헌이 크다. 주요저서로는 《Th럒rie des fonctions alg럃riques et de leurs int럊rales》(Appel과의 공저, 1896) 《Cours d'analyse math럐atique》(1905) 등이 있다.

 

굴베르그(1836.8.11~1902.1.14)

노르웨이의 화학자·수학자.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에서 화학·수학·물리학을 공부한 후, 1861년에 왕립 육군사관학교의 수학 및 열역학 교사를 지냈다. 69년에는 모교인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의 응용수학 교수가 되었다. 64년 의형(義兄)인 화학자 P.보게와 함께 ‘질량작용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는 P.E.M.베르틀로와 생지르의 화학평형에 관한 실험결과(1862)를 바탕으로, 보게가 300회 이상의 실험을 하고 굴베르그가 이를 수식(數式)으로 정리하여 법칙화한 것이다. 처음에 쓴 노르웨이어 논문과 두 번째의 프랑스어 논문(67)은 학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77년에 이 법칙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J.H.반트호프의 영향을 받아 독일어로 쓴 세번째 논문(79)이 겨우 주목을 받았다. 굴베르그는 67~90년 분자론에 입각하여 기체·액체·고체의 일반상태식(一般狀態式)을 구하는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물리화학의 응용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또 75년에는 노르웨이에 미터법을 채택하게 하였다.

 

그라스만(1809.4.15~1877.9.26)

독일의 수학자·언어학자. 슈테틴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이곳의 중학교 선생으로 평생을 보냈다. 독학한 것으로 생각되는 수학에서는 《광연론(廣延論):Ausdehnungslehre》(1844)의 저자로서 유명하며, 언어학에서는 인도유럽 조어(祖語)의 대기음(帶氣音:有氣音)에 관한 ‘그라스만의 법칙’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광연론은 수(數)에 관한 기초이론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며, 20세기에 들어와서 주목을 끌면서 그라스만 대수(代數)로서 전개되게 되었다. 또 만년에 출판한 인도의 고전 《리그베다의 사서(辭書):W쉜ter-buch zum Rigveda》와 번역 《리그베다:Rigveda》(2권)는 인도의 옛 주해(註解)에 얽매이지 않고 서유럽 인도학의 새로운 학문적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며, 특히 전자는 지금까지도 이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레고리(1638.11~1675.10)

스코틀랜드의 수학자·발명가. 미적분학의 고안에 공헌하였으며, 반사망원경을 발명하여 이것을 저서 《Optica Promota》(1663)에 기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하학적 도형의 면적측정에 관한 독자적 방법을 발표하여 호이겐스와 논쟁을 벌였으며, 망원경에 관하여 I.뉴턴과 서신을 교환한 일도 있다. 세인트앤드루스대학(1669)과 에든버러대학(74) 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Geometriae pars universalis》(68) 《Exercitationes geometricae》(68) 등이 있다.

 

그린(1793.7.14~1841.3.31)

영국의 수학자. 가업을 이어 빵 제조업에 종사하는 한편 수학을 독학했다. 학자들과는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연구 결과는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가, 그 일부분이 우연히 K.F.가우스에게 발견되었고 W.T.켈빈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자기현상(電磁氣現象)의 수학적 이론을 만들려고 시도, 퍼텐셜함수를 도입하여 ‘그린의 정리(적분정리)’를 유도하였고 그린함수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자기학(電磁氣學)의 해석적 취급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수학의 일부분으로서의 퍼텐셜론(論)을 향한 길이 열렸다. 저서로는 《전기학 및 자기학(磁氣學)의 이론에 수학해석을 응용하는 시도》(1828)가 있다.

 

내시(1920)

미국의 수학자. 웨스트버지니아주(州) 블루필드 출생. 프린스턴대학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4년 J.하사니, R.젤텐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하였다. 60년대 중반부터 내시는 기업체간의 상호작용과 시장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체스나 포커와 같은 일반적인 게임에서 적용되는 전략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여 내시균형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게임에서 각 경기자들이 어떤 특정한 전략을 선택하여 하나의 결과가 나타났을 때, 모든 경기자가 이에 만족하고 더 이상 전략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을 경우를 균형이라 한다. 그런데 이 중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해서만 최적인 전략을 찾아내서 균형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 즉 내시균형은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한 본인의 최적전략이라는 성격을 띤다.

 

네이피어(1550~1617.4.4)

영국의 수학자. 에든버러 근교의 머키스턴성(城) 출생. 스코틀랜드의 귀족 출신으로 남작이다. 13세에 세인트 앤드루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 유학하여 앙드리크 하반(河畔)에서 오랫동안 체재하였으며, 1608년 이후로는 머키스턴성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수학·신학·점성술 등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신학에서는 열렬한 신교도로서 로마교황과 그 권위에 반대하여 《성 요한 묵시록 전체에서의 소박한 발견:A Plain Discovery of the Whole Revelation of Saint John》(1594)을 발표하였다. 또 점성술에서는 예언에 관한 저술을 하는 등 그 재능을 보였다. 특히 40여 년에 걸친 수학 연구로 산술·대수(代數)·삼각법 등의 단순화·계열화를 꾀하였으며, 연구영역이 ‘네이피어 로드’ 등 계산기계의 고안에까지 미쳤다. 그 중 계산의 간편화를 목적으로 한 로그의 발명은 수학사상 커다란 업적이었다. 즉, 1614년 《경이적인 로그법칙의 기술:Mirifici Logarithmorum Canonis Descriptio》로 로그의 성질을 명백히 하였으며, 16년에는 H.브리그스와 협력하여 10을 밑[底]으로 하는 상용로그표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완성시키기 전에 죽어 《경이적인 로그법칙의 구조》(1619)가 유고로서 출판되었고, 그 일은 브리그스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로그를 등차수열적 운동과 등비수열적 운동을 대응시켜서 발견해 냈다. 또한, 소수기호(小數記號)의 도입자로서도 알려졌다.

 

노이만(1832.5.7~1925.3.27)

독일의 수학자·이론물리학자. 브란덴부르크 출생. F.노이만의 아들이다. 바젤대학·튀빙겐대학·라이프치히대학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기하광학(幾何光學)·퍼텐셜론 등 수리물리학 방면의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 뉴턴 역학의 바탕인 관성의 법칙에 관해 그 성립 조건을 검토하고 공간 내의 고립물체의 운동을 인식하기 위해 기준절대좌표계를 상정했다(?軸系의 이론). 학술지 《Mathematische Annalen》의 창간에도 기여하였다.

 

노이만(1903.12.28~1957.2.8)

헝가리 출신의 미국 수학자.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은행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1919년 베를린대학 및 취리히대학에서 공부하고 부다페스트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27년 베를린대학 강사로 있다가 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강사, 이어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 교수를 거쳐 33년 프린스턴고등연구소 교수가 되었다. 37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43년 이후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연구는 수학기초론에서 시작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설정 등 수리물리학적 과제를 대상으로 하고, 또한 수리경제학(數理經濟學)이나 게임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현대적 수학기초론의 출발점이 된 《집합론의 공리화(公理化)》(28)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27) 《힐베르트 공간론》(27) 등은 모두가 20대에 이룬 업적이었다. 그리고 《게임의 이론》(28) 《에르고드이론의 연구》(32)를 집필하고, 또 《위상군론(位相群論)》에서는 《콤팩트 위상군에서의 힐베르트 제5문제의 해결》(33)이나 《군(群) 위의 개주기(槪週期) 함수론》(34)으로 군 위의 조화해석(調和解析)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44년에는 O.모르넨슈테른과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을 저술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고속도 전자계산기(MANIAC:기상연구에 이용된 초기의 컴퓨터)의 연구·제작과 수치해석에 기여한 공로로 페르미상(Fermi賞)을 수상하였다. 그 외에 머리(Murray)와 함께 작용소환론(作用素環論)·연속기하(連續幾何)를 창시하였다. 45년에는 계산기계 연구소장, 54년에는 원자력위원이 되었다.

 

뇌터(1882.3.23~I935.4.14)

독일의 수학자. 에를랑겐 출생. 대수기하학자 M.뇌터의 딸이며, 동생 F.뇌터도 이론물리학 교수였다. 에를랑겐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후에 괴팅겐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22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어, 19세기의 수학으로부터 현대 수학으로의 과도기적인 추상대수학을 추진하여 D.힐베르트, 바일 등과 함께 괴팅겐대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18년 발표한 ‘가환환(可換環)의 이데알론(論)’으로 이른바 뇌터환(環)을 정식화한 것을 비롯하여 데데킨트환(環)의 분석(1926), 판별식 정리의 연구를 하였으며, 비가환대수(非可換代數)의 연구로 다원수론(多元數論)을 전개하여 접합적(接合積)·갈루아이론·국소유체론(局所類體論)과 추상대수학의 중심 과제를 거의 포괄하는 업적을 남겼다.

 

뉴턴(1642.12.25~1727.3.20)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근대이론과학의 선구자.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즈소프 출생. 수학에서의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의 뉴턴역학의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그의 출생 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그가 3세 때 재혼하는 등 불운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1661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 수학자 I.배로의 지도를 받아 케플러의 《굴절광학(屈折光學)》,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解析幾何學)》, 월리스의 《무한의 산수》 등을 탐독하였으며, 64년 학사학위를 얻었다. 64∼66년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자 대학이 일시 폐쇄되어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사색과 실험으로 보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때 싹트게 된 것이라고 하며, 사과의 일화도 이때 있었던 일이다. 67년 재개된 대학에 돌아와 이 대학의 펠로(특별연구원)가 되고 이듬해에는 메이저펠로(전임특별연구원)가 됨과 동시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69년 I.배로의 뒤를 이어 루카스교수직에 부임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최초의 강의도 광학(그 내용은 뉴턴 사후 《광학강의》로 1729년 출판되었다)이었으며, 초기 연구는 광학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광학에 대해서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反射式)이 수차(收差:色收差도 포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망원경은 천체관측 등에 크게 공헌하여 이 공적으로 72년 왕립협회회원으로 추천되었다. 그 해에 《빛과 색의 신이론(新理論)》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單色)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75년 박막(薄膜)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했다. 수학에서는 65년 이항정리(二項定理)의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無限級數)로 진전하여 66년 유분법(流分法), 즉 플럭션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적(求積) 및 접선(接線) 문제에 응용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적분법(微積分法)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성과를 69년에 논문 로 발표하였다. 유분법의 전개에 대해서는 에 수록되어 있다. 76년 그와 동일한 미분법을 발견한 라이프니츠와 우선권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사고방식도 실험적 방법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그 중점이 옮겨져 스스로를 수학자라고 하였다. 뉴턴의 최대 업적은 물론 역학(力學)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문제, 특히 중력(重力) 문제에 대해서는 광학과 함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行星)의 운동(이것을 지배하는 케플러법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졌다고 한다. 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당시 사람들도 행성의 운동중심과 관련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낸 유율법(流率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87년 이 성과를 포함한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되었으며, 이로써 이론물리학의 기초가 쌓이고 뉴턴역학의 체계가 세워졌다. 3부로 된 이 라틴어 저서는 간단한 유율법의 설명에서 시작하여 역학의 원리, 인력의 법칙과 그 응용, 유체(流體)의 문제, 태양-행성의 운동에서 조석(潮汐)의 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또 방정식론 등의 대수학(代數學) 분야의 여러 업적은 《Arithmetica universalis sive de compositione et resolutione arithmetica liber》(1707)로 간행되었다. 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91년 조폐국(造幣局)의 감사(監事)가 되었으며, 96년 런던으로 이주, 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改鑄)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神學)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였다. 이 성서 연구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징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고 그 곳에 묻혔다. 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며,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니코마코스(50~150?)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라비아의 게라사 출생. 신(新)피타고라스 학파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술서 《산술입문》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수론(數論)의 기초, 특히 수의 성질과 분류를 취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세제곱수는 연속되는 모든 홀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법칙의 발견이 있다. 즉, 13=1, 23=3+5, 33=7+9+11,··· 이 책은 그 후 아풀레이우스, 보에티우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에는 산술서로서 유클리드기하학과 함께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음악에 관해서도 저서《화성학(和聲學)》을 남겼다.

 

다르부(1842.8.14~1917.2.23)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에서 공부하며 C.에르미트의 지도를 받았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프랑스의 수학계를 이끌었으며 수학 및 천문학 잡지 《Bulletin des sciences math럐atiques et astronomiques》의 창간에 힘썼다. 19세기 초엽부터 기하학이 걸어온 좌표적·해석적 경향을 계승하여, 해석학과 상미분방정식론 또는 군론 등을 기초로 하여 기하학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주요 저서인 《일반곡면론강의(一般曲面論講義)》(4권, 1887∼96)는 미분기하학의 명저로 알려져 있다. 곡면론과 미분방정식론의 관련, 도형의 연속적 변형, 가동좌표축(可動座標軸)의 도입, 허원소(虛元素)의 사용, 또 사원좌표(四圓座標), 오구좌표(五球座標)의 도입 등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였고, 또 G.F.B.리만에 관한 이해도는 독일의 F.클라인과 비견된다고 한다. 그는 행정적·교육적 수완도 뛰어나 J.H.푸앵카레의 전기도 썼다.

 

달랑베르(1717.11.16~1783.10.29)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계몽사조기(啓蒙思潮期)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그 종신서기(終身書記)였다. 그는 섭정 오를레앙공(公) 시대에 저명한 살롱을 가진, 사교계의 꽃 드 탕생 후작부인의 사생아로 출생하여, 생후 곧 노트르담 성당 옆의 작은 교회 계단에 버려졌다 한다. 근처에서 살던 유리 직공 달랑베르의 아내가 주워다 길렀다. 그의 이름은 그가 20세 때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그의 친아버지인 데투시 장군이 그를 경제적으로 돌보았고, 죽은 후 거액의 유산을 남겼으며 또 장군의 유력한 친지가 그를 비호하여 23세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12세 때 콜레즈 드 카틀 나시옹에 입학하여 신학·법률·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얼마 후 철학·수학·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특히 역학(力學)에서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주저 《역학론:Trait?de dynamique》(1743)은 26세 때 공간(公刊)한 것인데, 그는 이 저서에서 그 당시에 프랑스에서 주류를 이루던 데카르트주의를 배척하고, 물체와 그에서 독립된 공간을 생각하는 뉴턴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 물체의 운동을 정역학(靜力學)의 경우와 같은 평형상태(平衡狀態)로 옮겨서 고찰하는 ‘달랑베르의 원리’를 설명하고, 역학의 일반화의 기초를 닦아 해석역학으로의 전개를 마련함으로써 역학발전의 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이 밖에 세차(歲差)와 장동(章動)의 문제(49), 달의 운동론에 관련된 3체(三體)문제의 연구 등, 천체역학 방면에도 공헌하였다. 사상가로서도 계몽사상가의 중심인물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D.디드로와 공동으로 편집·간행한 《백과전서》는 유명하다. 이 전서에서 수학·물리학·천문학 항목을 집필하였으며, 이 점은 백과전서파의 주장이었던 수학과 자연과학에 역점을 둔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 《백과전서》의 주류를 이루는 부분이었다. 그가 쓴 서론 속에 이 취지를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동시에 F.베이컨의 사상을 기초로 과학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을 고찰하고, 과학의 분류를 시도함으로써 과학편(科學編)에 큰 전망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입장은 감각적 인식론에 머물러 종교적 견해에는 많은 의문을 제시하면서도 디드로처럼 철저하지도 못해 일종의 물심이원론에 시종하였다.

 

데데킨트(1831.10.6~1916.2.12)

독일의 수학자. 브라운슈바이크 출생. 법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롤린대학에서 수학하고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여 M.A.슈테른, K.F.가우스, W.베버 등의 강의를 들었다. 또한 가우스의 후임이었던 디리클레의 영향도 받았다. 1854년 괴팅겐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58년 취리히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브라운슈바이크 고등기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수학 활동은 넓은 의미의 ‘수(數)’ 전반에 걸친 거의 모든 영역에 미쳤으며, 추상성과 일반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군(群)을 공리계(公理系)로 정의했던 초기의 연구에서도 이 경향은 명백했지만, 가장 유명한 역작인 《연속과 무리수》(1872)에서 풍족한 결실을 보였다. 여기에서 무한집합을 고찰하였고 절단개념(切斷槪念)의 도입으로 연속성을 규정하였으며, 무리수의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해석학의 기초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밖에 이데알이라 불리는 집합의 소분해(素分解)의 연구로 대수적 수에 관한 이론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데자르그(1591.3.2~1661.10)

프랑스의 수학자. 리옹 출생. 건축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군(軍)의 건축기사로 일하였는데, 1628년 드 리슐리외경(卿) 휘하에서 라 로셸포위작전에 종군하였으나, 곧이어 파리로 은퇴하여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기술적인 투시도법의 이론면을 고찰하여 기하학에 무한원(無限遠)의 사상을 도입하고, 또 대응(對應)의 개념을 사용하여 사영적(射影的)으로 기하학적인 표시법의 체계를 건설하였다. 《원추곡선론》(1636)은 이러한 고찰을 근거로 원추곡선을 사영기하학적(射影幾何學的)으로 설명한 것으로서 근세 기하학의 기초를 이룩한 중요한 고전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뛰어난 업적이 당시에는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사장되었다가 200년이 지난 1845년 M.샤를의 고서에서 발굴, 비로소 중요성이 재인식되었다. 그 사상은 파스칼이나 드라 히레 등에 의해 근세 기하학 전개에 영향을 끼쳤다. 또 건축가로서는 당시의 리옹시청사(市廳舍)를 설계했다. 작품으로는 《투시화법론:Trait?de la Section Perspective d’une atteinte aux럙럑ements des rencontres d’un c셬e avec un plan》(1636) 《평면과 원추와의 교합에 관한 연구계획 초안:Brouillon Project d’une atteinte aux evenements des rencontres d’un c퓆e avec unplan》(39) 《건축에서의 돌 절단법:La coupe des Pierres en I’architecture》(40) 등이 남아 있다.

 

데카르트(1596.3.31~1650.2.11)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 투렌라에 출생. 근세사상의 기본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세계를 몰가치적(沒價値的)·합리적으로 보는 태도(과학적 자연관)를 정신의 내면성의 강조(정신의 형이상학)와 연결지워 이를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하였다. 이원론은 동시에 근세사상 전체에 통하는 이원성의 표현이다.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 출신으로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6년 푸아티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운 스콜라적 학문에 불만, 세상을 통해 배울 것을 결심하고 여행에 나섰다. 18년에는 지원장교로서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 수학자 베이크만과 알게 되어, 물리수학적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편수학(普遍數學)’의 구상에 이르렀다. 20년 군대를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25년부터 파리에 체재, 광학(光學)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하였다. 29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에 은거하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형이상학 논문 집필에 종사하였으나, 같은해 3월 제자로부터 환일(幻日) 현상의 해명을 요청받고 중도에 자연연구로 전향, 결국 자연학(自然學)을 포괄하는 《우주론:Le Trait?de la monde》의 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단계에 G.갈릴레오의 단죄사실(斷罪事實)을 듣고, 지동설을 주내용으로 한 이 책의 간행을 단념, 그 대신 37년 《방법서설(方法敍說):Discours de la m럗hode》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시론(試論)을 출간하였다. 41년 형이상학의 주저 《성찰록: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44년에는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를 출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캘빈파(派) 신학자들의 박해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 무렵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가서 지내던 중 폐렴에 걸려 생애를 마쳤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물체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는 스콜라적 자연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리 수학적 연구를 통하여 물질, 즉 연장(延長)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이끌려 갔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더욱이 정신은 사고하는 것만으로, 다시 말하면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심신의 실재적 구별도 확정된다. 이리하여 정신과 물체가 서로 독립된 실체로 세워지고 이 물심이원론에 의해 기계론적 자연관의 입장의 기초가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심신결합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덕의 문제를 풀 수 없기 때문에, 이 물심분리와 심신결합의 모순 조정에 데카르트 이후 형이상학의 주요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디리클레(1805.2.13~1859.5.5)

독일의 수학자. 뒤렌 출생. 정수론(整數論)·급수론(級數論)·수리물리학 등에 공헌하였다.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집안의 아들로 파리에서 수학(修學)하고 당시 그 곳 수학의 대가들을 만났는데, 특히 J.J.푸리에와 친하게 지냈다. 훔볼트의 초청을 받아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고, 1839년 베를린대학 교수, 그 후 55년 K.F.가우스의 후임으로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연구 방면에서도 가우스가 구축해 놓은 정수론을 계승, 이것을 심화부연(深化敷衍)하는 공적을 남겼다. 어떤 조건 밑에서 산술급수가 무한의 소수(素數)를 포함한다는 정리를 비롯하여, 디리클레의 급수를 제시하고 이것을 정수론에 응용함으로써 해석적 정수론을 창시하는 등, 그 자신의 정수론에 대한 공헌도 대단했다. 한편 전문가들도 어렵다는 가우스의 《정수론》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 공적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 외에도 푸리에급수를 써서 함수의 근대적 개념 성립에 공헌하였고, 또 경계값 문제에서는, 이른바 ‘디리클레의 문제’를 다루어 퍼텐셜론(論)을 정밀화하는 등 여러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 또, 명강의로도 유명하여 그의 강의 스타일은 후에 독일 각 대학의 강의 형식의 기초가 되었다. 주요저서인 《정수론으로의 미분적분학의 여러 응용에 관한 연구》(1839)는 오늘날의 해석적 정수론의 기원이 되었다.

 

드로비슈(1802.8.16~1896.9.30)

독일의 철학자·수학자. 라이프치히 출생. J.헤르바르트의 제자이자 1842년 라이프치히대학 교수이다. 논리학적으로는 형식논리학에서 존재와 사유(思惟)의 일치로서의 형이상학적 논리학으로 이행(移行)하고, 심리학적으로는 수학적 심리학의 입장에 섰다. 주요저서는 《신논리학:Neue Darstellung der Logik nach ihren einfachsten Verh둳tnissen》(1836) 《헤르바르트의 철학체계:Beitr둮e zur Orientierung 웑er Herbarts System der Philosophie》(43) 《수학적 심리학:Erste Grundlinien der mathematischen Psychologie》(50) 등이다.

 

드모르간(1806.6.27~1871.3.18)

영국의 수학자·논리학자·서지학자(書誌學者). 인도 마두라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1828년 22세의 나이로 신설된 런던대학 수학 교수에 취임,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다. 66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스로 수학협회를 창설, 초대 회장이 되었다. 수학자로서는 연구 주제를 엄밀한 기초 위에 둘 것을 강조하였고, 특히 집합연산의 기초적 법칙을 발견했는데 이 법칙은 그의 이름을 따서 ‘드모르간의 법칙’이라 한다. 근대적인 대수학(代數學)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논리학적 측면을 개척하여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확률론에도 공헌하였다. 38년에는 ‘수학적 귀납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경험과학과 수학적 증명에서의 귀납법의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기지(機智)가 뛰어난 능변가이자 문장가로서도 유명하여 철학자 W.해밀턴과의 논쟁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수학·수학사상의 보급에 기여하였고, 산술·초등대수·유클리드기하학 등을 계몽하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해설로 책을 저술하여 수학교육 혁신에 이바지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산술원론(算術原論)》(1831) 《대수원론(代數原論)》(35) 《대수학의 기초에 관하여》(41,47) 등이 있다.

 

드무아브르(1667.5.26~1754.11.27)

프랑스 출신의 영국 수학자. 위그노교도였기 때문에 1685년 낭트 칙령의 폐지에 따라서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가정교사로 생계를 꾸려갔다. 런던에서는 I.뉴턴 등과 친교를 맺고 97년 영국학사원 회원, 그 후에는 베를린·파리의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주요업적으로는 3각법에 관한 기본정리로서 ‘드무아브르의 정리’로 알려진 법칙과 확률론에 있어서의 정규확률곡선의 발견이 있고, 보건수학(保健數學) 분야에서도 연금에 관한 연구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우연의 교의(敎義):The Doctrine of Chances》(1917) 《해석잡론(解析雜論)》(30) 등이 있다.

 

디리클레(1805.2.13~1859.5.5)

독일의 수학자. 뒤렌 출생. 정수론(整數論)·급수론(級數論)·수리물리학 등에 공헌하였다.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집안의 아들로 파리에서 수학(修學)하고 당시 그 곳 수학의 대가들을 만났는데, 특히 J.J.푸리에와 친하게 지냈다. 훔볼트의 초청을 받아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고, 1839년 베를린대학 교수, 그 후 55년 K.F.가우스의 후임으로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연구 방면에서도 가우스가 구축해 놓은 정수론을 계승, 이것을 심화부연(深化敷衍)하는 공적을 남겼다. 어떤 조건 밑에서 산술급수가 무한의 소수(素數)를 포함한다는 정리를 비롯하여, 디리클레의 급수를 제시하고 이것을 정수론에 응용함으로써 해석적 정수론을 창시하는 등, 그 자신의 정수론에 대한 공헌도 대단했다. 한편 전문가들도 어렵다는 가우스의 《정수론》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 공적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 외에도 푸리에급수를 써서 함수의 근대적 개념 성립에 공헌하였고, 또 경계값 문제에서는, 이른바 ‘디리클레의 문제’를 다루어 퍼텐셜론(論)을 정밀화하는 등 여러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 또, 명강의로도 유명하여 그의 강의 스타일은 후에 독일 각 대학의 강의 형식의 기초가 되었다. 주요저서인 《정수론으로의 미분적분학의 여러 응용에 관한 연구》(1839)는 오늘날의 해석적 정수론의 기원이 되었다.

 

디오판토스(246?~330?)

3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던 그리스의 수학자. 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주저 《산수론(算數論) Arithmetica》은 13권 중 6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주로 1차부터 3차까지의 정방정식과 부정방정식의 문제와 해법이 다루어져 있다. 특히, 해법의 부정해석(不定解析)은 디오판토스의 해석이라고 불린다. 그는 마이너스(-)·미지량(未知量)·상등(相等)·거듭제곱 등의 기호를 조직적으로 채용했다. 그의 《산수론》은 아라비아어(語)로 번역되어 그곳 학자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뒤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 말기에 유럽으로 전파되어 대수학 발달에 공헌했다. 저서 중 ‘주어진 제곱수를 2개의 제곱수로 나누어라’라는 문제는 뒤에 페르마에게 영향을 끼쳐, 페르마의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라그랑주(1736.1.25~1813.4.10)

프랑스의 수학자·천문학자. 이탈리아의 토리노 출생. 19세 때 그곳 왕립육군학교 수학 교수가 되었다. 1766년 프리드리히(2세) 대왕에게 초청되어 L.오일러의 후임으로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수학부장에 취임하였다. 대왕 서거 후 87년 파리로 이사하여 혁명정부의 미터법 제정위원장으로 일하였다. 95년 신설된 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의 교수가 되고, 그 후 파리의 이공과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학문적인 초기의 업적에는 등주문제(等周問題)에서 시작한 변분법(變分法)이 있으나, 이것은 오일러의 방법을 순수하게 해석적인 것으로 발전시킨 방법으로, 라그랑주는 이 변분법을 역학의 여러 문제에 응용하였다. 그가 해명한 해석역학은, I.뉴턴의 미적분에 의한 운동방정식이 확립된 후 100년만의 일로, 그때까지 발전한 해석학을 역학에 응용한 것이며, 그의 저서 《해석역학》(1788)에 의해, 역학은 하나의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라그랑주의 해석역학에 의한 운동방정식은 뉴턴의 방법에 비해 보다 일반적으로 운동의 미분방정식을 유도할 수 있다. 대수(代數)에 있어서의 그의 일반화 방향은 5차 이상의 대수방정식 해법에 대한 연구로서, 이 연구는 근(根)의 치환군(置換群)에 착안한 것으로, N.H.아벨과 E.갈루아의 업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외에도 정수론·타원함수론·불변식론(不變式論) 등에 관해 많은 연구 업적이 있으며, 천체역학 분야에도 기여하였다. 특히 삼체문제(三體問題)의 연구는 유명하다.

 

라마누잔(1887.12.22~1920.4.26)

인도의 수학자.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15세 때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수학책을 통해서 재능이 있음을 알았으나 집안이 가난한데다 신분이 낮고 학력이 없어 어려운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영국의 수학자 G.H.하디(1877∼1947)에 의해서 특이한 재능이 높이 평가되어 정부의 연구비를 지원받게 되었고, 1914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때까지 그는 근대수학이라는 것을 모르고 연구하였고, 또 추론(推論)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방법에 의한 깊은 명찰과 직관과 귀납으로써 뛰어난 결과들을 많이 도출해 내었다. 그 뒤에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 가운데는 현대 정수학(整數學)의 깊은 부분에 관계되는 중요한 예상이 몇몇 남아 있다. 특히 자연수 n의 분할수(分割數) p(n)에 관한 것이 유명하다. 18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뽑혔다. 19년 인도로 귀국하였으나, 병으로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라이프니츠(1646.7.1~1716.11.14)

독일의 철학자·수학자·자연과학자·법학자·신학자·언어학자·역사가. 라이프치히 출생. 그리고 외교관·정치가·기사(技師) 등 실무가로서도 유능하였다. 라이프치히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의 장서 중 철학·고전을 탐독하고 논리학에 흥미를 가졌다. 12세 때 거의 독학으로 라틴어에 통달하였고 1661년 15세 때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수학, 이어 예나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쓴 논문 《개체의 원리:De Principio Individui》(1663) 《결합법론:De Arte Combinatoria》(66)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그 내용은 후일까지 그의 사상을 일관하였다. 66년 라이프치히대학에 학위를 신청하였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67년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이 대학이 제공한 객원교수의 자리를 사퇴하고, 그곳에서 연금술사들의 결사 로젠크로이체르에 들어가 비서가 되어 화학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마인츠후국(侯國)의 정치가인 J.C.보이네부르크 남작과 알게 되어 70년 마인츠후국의 법률고문이 되었다. 정치생활에 들어가 마인츠후국의 외교사절로서 72년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였으며, 루이 14세의 침략으로부터 독일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면서도 형이상학을 연구하였다. 또 런던과 파리의 뛰어난 수학자·물리학자들과도 접촉하여 자연과학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구체적 운동의 이론》 《추상적 운동의 이론》은 70년경에 쓴 것으로, ‘불가분의 점(點)’의 가설에 서서, 운동을 물질의 본질인 것으로 보려는 형태를 취하였다. C.호이겐스, A.아르노, N.말브랑슈, R.보일 등과의 접촉에서는 당시의 최고 수준의 수학이나 데카르트 철학을 흡수하여 많은 논문을 쓰고, 영국 왕립학회회원이 되어, 그 후 우수한 계산기를 발명하였다(74). 그러나 보이네부르크나 마인츠 선거후(選擧侯)가 잇달아 죽었으므로 그는 프랑스에 체류한 채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 학술원의 연금을 받으려는 공작도 실패하여, 76년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후(侯) 프리드리히의 초청을 받아들여 하노버로 갔다. 그 도중 스피노자와 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버가(家)에서는 궁정고문이나 도서관리 등의 일을 맡아,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다면적인 활동을 하였다. 거기에는 공법학자·정치가로서의 활동, 독일 통일을 지향하는 신구 양 교회 및 신교 각파의 통일을 위한 노력, 《지구 선사(先史)》를 계기로 한 일반사의 연구, 언어 연구, 광산의 치수(治水)나 거기에 따른 풍차의 설계·건설, 백과전서의 계획, 아카데미 설립의 노력(1700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됨) 등이 포함된다. 이 밖에 그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한 수학·자연과학·철학상의 연구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말년은 불우하였으며, 실의 속에 70세의 생애를 하노버에서 마쳤다.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의 창시(1684∼86)가 유명하다. 이것은 뉴턴과는 별개로 전개된 것이며, 미분 기호, 적분 기호의 창안 등 해석학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역학(力學)에서는 R.데카르트를 비판하여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 개념을 주어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향해 커다란 진전을 남겼으며(86), 위상(位相) 해석의 창시도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이다. 철학에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철학을 극복하고, 거기에 젊을 때부터의 ‘보편학’의 구상을 체계화한 《형이상학서설(形而上學敍說) Discours de M럗aphysique》(86)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통하여 발전시킨 ‘표현’과 ‘표출’ ‘실체’ 개념의 결실인 유고(遺稿) 《단자론(單子論):Monadologia》(1720)이 유명하다. 실체개념을 논한 논문 중에는 ‘예정 조화(豫定調和)’의 개념을 도입(1696)하기도 하여 베일과의 논쟁을 초래하였다. J.로크의 비평으로서의 유고 《신인간오성론(新人間悟性論)》(1765)이나 《변신론(辯神論):Th럒dic럆》(1710)도 유명하다. 그의 지우(知友)였던 프로이센 왕비 조피 샤를로테를 위해서 쓴 《변신론》은 예정 조화의 입장에서 철학과 종교의 융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독창적인 것이었으나, 한편 신학적·형이상학적 요소(신과 예정 조화)를 지님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변증법적 요소(개별과 보편, 유한과 무한의 연관, 실체의 자립 개념 등)를 갖추고, 신앙고백과 논리적 논증이 공존하여, 기계론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모순율을 기초로 하는, 말하자면 모순을 내포한 타협적인 것이었다. 그 배경을 당시 독일의 모순에 가득찬 사회적 생활에서 구하려는 견해도 있다.

 

라플라스(1749.3.23~1827.3.5)

프랑스의 천문학자·수학자. 칼바도스의 보몽타노주 출생. 1765년 육군학교 위탁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수학의 재능을 나타냈다. 67년 파리에서 달랑베르의 인정을 받고 고등사범학교와 에콜폴리테크니크 교수로 취임하여 행렬론·확률론·해석학 등을 연구하였다. 73년 수리론(數理論)을 태양계의 천체운동에 적용하여 태양계의 안정성을 발표하였다. 또한 오일러와 라그랑주 이래 미해결문제로 남아 있던 목성과 토성의 상호섭동(相互攝動)에 의한 궤도의 이심률과 경사각은 오랫동안 변화하지 않고 장주기변동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 후 이 변동 한계에 관해 라그랑주와 서로 반론이 거듭되었으나, 84∼86년 라플라스가 《파리과학아카데미 기요(紀要)》라는 잡지에 3편의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해결되었다. 87년 달의 공전가속도는 지구 궤도의 이심률 변동에 기인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와 같은 획기적 성과를 체계화하여 1799~1825년 《천체역학》(전 5권)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뉴턴의 《프린키피아》와 맞먹는 명저로 간주된다. 1796년 간행된 일반인을 위한 저서 《세계계도설(世界系圖說)》은 태양계의 기원에 관한 성운설의 구상을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이것은 칸트의 설(說)을 보충·개정하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란다우(1877.2.14~1938.2.19)

독일의 수학자. 베를린 출생. 1909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33년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 후에는 베를린으로 돌아가서 생활하였으며, 그 동안에 케임브리지대학 등의 초청으로 국외를 여행한 일도 있다. 저서나 논문이 많은데, 특히 해석적 수론(解析的數論)과 함수론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의 저서 《소수분포론(素數分布論)》(1909)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론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자신의 최신의 기여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하였으나, 10년대 후기의 저서나 논문에서는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였다. 수학논문의 이와 같은 문체를 란다우슈틸(Landau-Stil)이라고 부른다.

 

람베르트(1728.8.26~1777.9.25)

독일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철학자. 알자스 뮐하우젠 출생. 재봉직공인 아버지를 돕기 위해 12세 때 학교를 그만둔 후 17세 때 법률가의 비서가 되면서 인문학·철학·과학을 독학하였다. 천문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광학을 연구, 《광도측정법》(1760) 《혜성궤도의 특이성》(61) 《세계의 구조에 대한 우주론적 서간》(61) 등 3권의 저서를 공간(公刊)하였다. 이 때문에 전 유럽에서 유명해져 프리드리히대왕에 의해 베를린아카데미회원, 교수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토목측량과 같은 국가적 사업에도 중용되었다. 천문학 연구에서는 혜성의 궤도 결정의 기본문제 처리(람베르트의 정리)에서 시작하여 우주구조설(람베르트의 星辰系)을 통해 은하 설명을 시도하였고, 물리학에서는 광도측정에 대한 기초 확립에 뜻을 두고 실험(람베르트의 법칙)하여 람베르트의 광도계를 제작하였다. 또 자기장의 역제곱의 법칙을 발견하여 쿨롱의 선구자가 되었고, 열학에서는 습도측정 연구로 습도계·열도계를 제작해서 저서 《고온계측》(79)에서 열복사 연구의 기초를 세웠다. 또 기체의 부피가 0이 되는 점을 절대영도로 정의하여 그 값을 -273 ℃라고 정하였다. 수학에서는 《자유투시법》(59)을 써서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을 도입하였고, 평행선공리문제를 연구하여 비(非)유클리드기하학을 개척하였다. 람베르트급수 도입, 쌍곡선함수 발견 등도 뛰어난 업적이다. 철학저서로는 《신(新)오르가논》(64) 《체계학》(71) 등이 있다. 이들은 수학과 정밀한 증명을 철학에 결부시키려는 의도 아래 전개된 것으로 C.볼프의 이성론과 J.로크의 경험론을 서로 결합시켜 독특한 인식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러셀(1872.5.18~1970.2.2)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수학자·사회사상가. 몬머스셔 트렐렉 출생. 명문 귀족의 아들로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한때 동대학 강사로 근무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전운동(反戰運動)이 화근이 되어 대학에서 쫓겨났고, 18년에는 6개월간 옥고를 치르었다. 그 후 유럽 각국과 러시아·미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대학의 강의도 맡았으나, 주로 저술에 주력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사회운동을 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논리학자로서의 러셀은 G.프레게의 업적을 계승, G.페아노, 쿠츨러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J.W.R.데데킨트, G.칸토르 등의 현대수학의 성과를 근거로, 19세기 전반에서 비롯된 기호논리학의 전사(前史)를 집대성하였다. A.N.화이트헤드와 공저(共著)인 《수학원리》(3권, 1910∼13)는 바로 이의 성과이다. 그는 논리의 개념이나 연산(演算)을 기본으로 하여 전체 수학을 그것으로부터 도출(導出)했으며, 나아가 수학적 대상을 실재라고 간주하는 논리주의의 구상을 밝혔다. 그는 이 시도를 실수(實數)의 도출에까지 성공시켰으며 그 외에도 집합론 역리(逆理)의 발견, 그리고 그것의 해결을 꾀하는 계형이론(階型理論), 환원의 공리(公理), 기술이론(記述理論) 등 다양한 창의에 의한 공헌을 하였다. 논리주의의 구상이나 위의 여러 이론은 그 후 K.괴델 및 다른 학자에 의해 부정 또는 수정되었지만, 이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의 의의는 현재도 상실된 것은 아니다. 철학자 러셀의 성과는 특히 이론철학에서 현저하다. G.E.무어, L.비트겐슈타인 등과 함께 케임브리지학파의 일원으로,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도 유력한 학설이었던 관념론에 대해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다만 그의 입장에는 시대에 따른 변화가 크게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한때지만 그는 영국 헤겔학파의 영향 밑에 있었으며, 마이농류(流)인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의 경향도 보였다. 이것에 관한 저서로는 《철학의 제문제》(1912)가 있다. 그러나 그의 인식론·존재론의 일반적 경향은, 한편으로는 자기의 논리를 소재(素材) 방법으로 삼았으며, 다른 면에서는 영국 고유의 경험론의 전통을 근거로 삼았다. 또한 논리적 원자론의 이름에서도 명백한 바와 같이 실재의 이론적 단위를 설정하여, 그것에의 환원이나 분석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한 점도 명백하다. 그의 사상은 빈학파나 훗날의 영국 철학의 발전을 위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윤리학에서는 처음에 무어와 거의 같은 입장을 취하였으나, 후에 논리실증주의자의 정서설(情緖說)에 가까운 입장으로 옮겼다. 사회사상가로서의 러셀은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직후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교우하여 마르크스주의에 공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를 방문, 혁명지도자와 혁명 후의 실정에 접하게 된 그는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의 경향은 서구적 자유를 근간(根幹)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로서, 정치이론도 과학이론과 같이 이데올로기나 광신적 독단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실천가로서의 러셀은 1907년 하원의원으로 입후보하여 낙선했고, 20년대는 일반대중을 위한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BBC 방송 출연 등으로 유명해졌으나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60년 ‘100인 위원회’를 구성, 핵무장 반대 연좌농성을 이끌어 네번째 부인과 함께 금고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철학적 경력은 길고 또 그 다룬 주제가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입장도 다양한 변천을 보인다. 기호논리학의 수법으로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의 영향은 20세기 철학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저서로는 위에서 소개한 것 외에도 《외계의 지식》(14) 《수리철학 서설》(19) 《정신의 분석》(21) 《물질의 분석》(27) 《의미와 진실의 탐구》(40) 《서양 철학사》(45) 《자서전》(3권, 69) 등이 있다.

 

레기오몬타누스(1436~1476)

독일의 천문학자·수학자.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본명은 Johann M웞ler. 1452년 빈에서 포이어바흐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61년 스승의 사망 후 로마로 유학, 그리스어 원전 《알마게스트:Almagest》 등 여러 과학서적을 번역하였다. 68년 이들 원전을 가지고 귀국한 후, 뉘른베르크의 부호 B.발터의 도움을 얻어 71년 독일 최초의 천문대를 건설하고, 새로운 천문기기(天文器機)의 제작과 천체관측에 힘썼다. 그리고 관측자료를 토대로 54년부터 60년까지 《천체위치추산표(天體位置推算表)》를 편집하였다. 또한, 항성과 달 사이의 각거리를 측정하여 원격(遠隔) 2지점의 시간을 비교하는 방법(태음거리법)을 창안하였다. 이를 이용함으로써 원양항해에서의 경도결정이 가능하게 되었고, 대항해(大航海)시대의 막이 올랐다. 72년 핼리혜성을 관측하고, 이것을 처음으로 천체로 인정하였다. 75년 로마교황청의 초청으로 개력(改曆)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급환으로 사망하였다.

 

레비치비타(1873.3.29~1941.12.29)

이탈리아의 수학자. 파도바 출생. 1898년 파도바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18~38년 로마대학 교수를 지냈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대학교수에게 파시스트당 정부에 대한 선서를 요구하였지만 과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선서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스승인 리치와 함께 절대미분학(絶對微分學)을 창시하고 그 결과를 《절대미분학의 방법과 그 응용》(1900)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유클리드공간에서의 평행의 정의를 리만공간으로 확장하였다. 텐서 해석(解析)은 리만기하학의 연구에 적절한 방법이고 아인슈타인에 의한 일반상대성이론, 그리고 중력장의 이론에도 사용되었다.

 

레코드(1510?~1558)

영국의 수학자·의사. 펨브룩셔의 템비 출생.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뒤에 궁정에 초빙되어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영국에서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설(說)을 이해하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산술서(算術書) 《제예(諸藝)의 기초》(1540)는 당시 유럽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기호를 사용하였고, 또 교사와 학생의 대화형식으로 썼다. 《기지(機智)의 숫돌:Whetstone of Witte》(1557)은 영국 최초의 대수서(代數書)로서, 이 책에서는 오늘날 많이 쓰이는 등호가 이미 사용되었다. 그 밖에 기하학서인 《지혜로의 길:The Pathway to Knowledge》(51)이 있다. 감옥에서 죽었는데, 투옥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레티쿠스(1514.2.16~1576.12.4)

독일의 천문학자·수학자. 본명은 Georg Joachim von Lauchen. 오스트리아의 펠트키르흐 출생. 뉘른베르크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536년 비텐베르크대학, 42년 라이프치히대학 등에서 수학 교수를 지냈다. 1539∼41년 코페르니쿠스를 프라우엔부르크로 찾아가 그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요저서 《천구(天球)의 회전에 대하여》의 출판에 노력하였으며, 또 스스로 그 해설서 《코페르니쿠스설(說) 제1화》(40)를 발표하여 지동설의 보급에 힘썼다. 특히 수학부문을 보충하기 위하여 10초 간격의 사인표를 끈기 있게 계산하였으며, 탄젠트표와 시컨트표의 계산은 그의 사후에 제자 V.오토가 완성하였다(56).

 

로바체프스키(1792.12.1~1856.2.24)

러시아의 수학자. 1807년 카잔대학에 들어가 수학을 공부하였다. 학생시절에는 매우 난폭하여 감옥에 들어간 일도 있으나 수학에는 재능이 뛰어났다. 11년 카잔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에 남아 교편을 잡았고, 16년 젊은 나이로 정교수가 되어 수학 외에 천문학·물리학 등도 강의하였다. 그 뒤 대학 도서관장·박물관장을 겸하였고 수학·물리학부장이 되었다가 27년 학장이 되었다. 유클리드기하학의 기초공리를 검토하여 유클리드기하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하학의 성립 가능성을 상정(想定)하여 26년 카잔 수학·물리학 협회에서 발표하여 헝가리의 J.볼리아이와는 별도로 비유클리드기하학을 창시하였다. 이 연구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냉담하였고 연구 초고(草稿)마저 분실하였으나, 29년 카잔대학 학보에 다시 발표하고 그 구체적 전개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그 성과를 40년 베를린에서 발표한 《평행선 이론의 기하학적 고찰:Geometrische Untersuchungen zur Theorie der Parallellinien》에 집약하여, K.F.가우스를 위시한 수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수학에서는 《유한의 계산》(34), 수학해석(數學解析)에서는 《3각급수의 소멸》(34) 《무한급수의 수렴성》(41) 《몇몇 적분에 대하여》(52) 등이 있고, 함수의 미분 가능성과 연속성의 구별을 처음으로 지적하고 ‘로바체프스키 방정식’으로 불리는 대수방정식의 수치해법을 행하는 등 폭넓은 연구를 하였다.

 

르루아(1870.6.8~1954.11.11)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 처음에 과학을 배워 1898년에 과학박사가 되었고, 파리고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으나, H. 베르그송의 권유로 철학으로 전향하였다. 1921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고, 4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자유롭게 자기를 창조하는 자아(自我)를 바탕으로 프래그머티즘의 입장에서 과학과 종교를 논하였다. 과학은 실천을 목적으로 현실을 정리하는 것이고 종교적 도그마도 도덕적인 행위의 원천이라고 보고 진리의 인식을 삶에서 구하였다. 주요저서에 《도그마와 비판:Dogme et Critique》(1906) 《제1철학시론(試論):Essai d’une philosophie premi뢳e》(2권, 56∼58)이 있다.

 

르베그(1875.6.28~1941.7.26)

프랑스의 수학자. 에콜 노르말을 졸업하고, 파리대학과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학위논문 《적분(積分)·길이·면적》에서, 리만이 정립해 놓은 적분의 정의를 더욱 일반적인 점집합의 관점에서 정의하였다. 이 이론은 근대적인 적분론의 단서도 되고, 확률론의 측도론적 연구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푸리에 급수론 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보다 일반적인 힐베르트공간론(Hilbert space)으로서 취급받게 되었다. 또한 위상기하학(位相幾何學)에 있어서도 밀집성의 정의와 밀집한 집합에 관한 르베그수(數)의 도입 등 기초가 되는 연구를 하였다.

 

르장드르(1752.9.18~1833.1.10)

프랑스의 수학자. 툴루즈 출생. 파리의 종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775년 파리의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되었고, 83년 아카데미 프랑스츠의 회원이 되었다. 또 에콜 폴리테크니크(이공과대학)의 시험관 및 측지감독관 등을 지냈다. 타원적분·오일러 적분 등의 적분학과 유클리드기하학의 기초 및 최소제곱법, 측지학 등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1798∼1830년의 《정수론(整數論):Th럒rie des nombres》에서는 ‘2차 상반법칙’의 공식을 정립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제곱잉여에 관한 기호(Legendre’s symbol)를 남겼다. 1806년 《최소제곱법에 관하여:Sur la M럗hode des Moindres Quarr럖》에서 ‘최소제곱법’을 K.F.가우스에 앞서 발표하였고, 25∼26년 《타원함수론:Trait?des fonctions elliptiques》에서 이른바 퍼텐셜(potential)의 개념으로 불리는 ‘르장드르함수’를 도입한 ‘타원적분’의 분류를 논하고 있는데 이는 19세기에 있어서의 타원함수론 발전의 선구가 되었다. 그의 저서 《적분학 연습》 《타원함수론》 《오일러 적분론》 등은 오랫동안 교과서로서의 권위를 지켜 왔는데 특히 《기하학의 요소들:El럐ents de g럒m럗rie》는 근대적인 초등기하학의 교과서로서 각국어로 번역되었으며, 또한 삼차원 조화함수와 관련되는 구함수(球函數)에 대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미분방정식은 유명하다.

 

리(1842.12.12~1899.2.13)

노르웨이의 수학자. 노르드피오르데이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현 오슬로대학)에서 수학한 후, 1869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F.클라인(1849∼1925)과 친교를 맺고 공동으로 수학연구를 하고 논문도 썼다. 그 후 71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받고 이듬해에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73년 연속변환군의 연구를 시작하여 ‘리의 구면기하학(球面幾何學)’을 발견하였으며, 84년 이후 F.엥겔(1821∼96)과 협력하여 변환군 연구를 계속하였다. 86년 클라인의 뒤를 이어 라이프치히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98년까지 강의하였다. 98년에 건강을 해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변환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해석적인 형태로 이 운동을 추구하여 기하학적 변환의 이론에 신기원을 이루어 놓은 것과 함께 변환의 일반이론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서 연속군(連續群)의 이론을 창시하였다. 이 연속군을 리군(群)이라 부르는 것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때문이다. 또한 미분방정식론에의 공헌도 컸다. 저서에는 F.엥겔과의 공저인 《변환군론(變換群論):Theorie der Transformationsgruppen》(3권, 1893)과 G.셰파스와의 공저인 《연속군론(連續群論) 강의》 등이 있다.

 

리만(1826.6.17~1866.7.20)

독일의 수학자. 하노버 출생. 괴팅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51년 괴팅겐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51년 같은 대학 강사, 57년 조교수, 59년 디리클레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다. 폐결핵 때문에 만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그의 짧은 일생을 통해 발표한 논문의 수는 비교적 적지만, 수학의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복소함수론에서의 연구의 특징은, 유체역학적 고찰에 의해 수학의 다른 많은 영역과 복소함수론 사이에 광범위한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또 복소함수의 기하학적인 이론의 기초를 닦아 준 점이다. 1851년의 학위논문에서, (x, y) 평면을 (u, v) 평면 위에 등각적(等角的)으로 사상(寫像)시켜, 한 평면 위의 임의의 단일연결역(單一連結域)이 다른 평면 위의 임의의 단일연결역으로 변형될 수 있는 함수를 증명하였다. 이것은 57년의 아벨함수에 관한 논문으로, 위상수학적 고찰을 해석학으로 도입한 리만면(面)의 개념으로 유도한 것이다. 54년의 교수자격 취득 논문에서, 리만적분을 정의하고, 삼각급수의 수렴에 관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 적분의 정의는 함수가 적분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 정의는 20세기에 접어들어 H.르베그에 의해 더욱 포괄적인 정의가 부여되었다. 54년 취임강연에서 기하학의 기초를 논하면서, 리만공간의 개념을 도입하여, 리만공간의 곡률(曲率)을 정의하였다. 이 연구는 로바체프스키 등에 의해 발견된 비유클리드기하학도 어느 특별한 경우, 즉 곡률이 음[負]인 공간으로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곡률이 양[正]인 곡면상에서의 기하학은 리만기하학이라 불리며, 구면(球面)에서는 직선은 대원(大圓)으로 정의되며, 거기서는 두 개의 직선은 반드시 두 점에서 교차되며, 따라서 평행선은 없다. 그의 기하학의 기초가 된 것은 직선이란 무엇이냐, 또 그것을 정의하기 위한 장소는 어떤 곳이냐 하는 점으로 요약된다. 58년 소수분포에 관한 논문에서는 ζ함수를 응용하여 해석적 수론의 기초를 닦았다. ζ함수의 성질에 대한 리만의 가정 ‘ζ(s)는 s=x+iy에 대해서 생각할 때 x>1/2로 0점은 없다’는 오늘날까지 증명도 부정도 되지 않은 상태이다. 만년에는 W.E.베버의 영향을 받아서, 이론물리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편미분방정식(偏微分方程式)에 대해서 강의하였다. 그가 죽은 뒤 베버에 의해 출판되었다.

 

리에스(1880.1.22~1956.2.28)

헝가리의 수학자. 함수해석학의 개척자로 유명하다. 1914년 클루지대학 교수, 45년 부다페스트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리스 피셔의 정리(1907)에 의해서 초기 양자론 분야에 공헌하였고, 에르고드 이론, 반순서(半順序) 벡터공간 이론, 위상기하학 등의 분야에도 공헌하였다. 주요저서에 《Le뛬ns d’analyse fonctionnelle》(52)이 있다.

 

리우빌(1809.3.24~1882.9.8)

프랑스의 수학자. 1825년 파리 이공과대학에 입학하였다가 2년 후에 교량토목학교로 옮겼다. 31년 이공과대학 조교수, 38년 교수가 되었으며, 다음해 아카데미 데 시앙스의 회원이 되었고, 51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업적은 거의 수학 전분야에 걸쳐 약 450편의 논문을 발표한 것 외에 잡지 《순수응용수학(일명 리우빌 잡지)》(36년)을 창간하였으며, 74년까지 그 편집을 맡았다. 논문 중의 초월수의 존재 증명과 미분·적분 및 해밀턴의 정준운동(正準運動) 방정식의 풀이는 이후의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정준방정식에 대한 보존정리는 통계역학에서 에르고드이론의 기초가 되었으며, E.갈루아가 대수방정식을 승근(乘根)으로 풀 수 있는 여러 조건을 밝힌 사실을 《순수응용수학》에 발표하여 세상에 소개하였다. A.L.코시와 협력하여 ‘리우빌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리치쿠르바스트로(1853.1.12~1925.8.6)

이탈리아의 수학자. 라벤나의 루고 출생. 1890년 이래 파도바대학 교수로 있었다. G.F.B.리만의 이론을 계승하여 ‘리만기하학’을 2차 미분형식의 불변식론(不變式論)과 관련시켜 전개해서 절대미분학을 창시하였다. 텐서해석의 정식화는 그의 이론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리치의 텐서’ ‘리치의 공식’ 등으로 그 이름이 유지되고 있다.

 

린델뢰프(1870~1946)

핀란드의 수학자. 1887년 헬싱키대학에 입학했으며, 90년의 첫 논문은 미분방정식에 관한 것이었다. 93년 학위를 받고, 95년 헬싱키대학 강사가 되어 1903~38년의 정년퇴직에 이르기까지 동 대학의 교수로 있었고, 그 이후에는 명예교수가 되었다. 또 1907년부터는 북유럽의 대표지 《악타 마테마티카》의 편집에 종사하였다. 현재 상식화되어 있는 함수론의 기초사항에 대한 중요한 공헌은 이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어 정함수의 값분포 내지는 Ch.E.피카르의 정리 연구로 옮겼는데, E.프라그멘과의 공동연구에 의해 근대함수론에 끼친 공헌은 특히 눈부시다. 조화함수에 의한 평가라는 원리에 근거한 여러 성과는 R.네반리나, A.보이를링, L.V.알포르스 등에게 계승되어 기하학적 함수론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한편, 이 사이에 그의 이름을 붙인 점집합론의 결과가 얻어졌다. 이어 1920년 무렵부터 등각사상론으로 옮기어 경계의 대응에 관한 업적을 성취하였다. 만년에 저술한 《해석학 교정(解析學敎程)》(5권)은 교과서로도 이용되었다. 헬싱키대학 재임 43년간을 통하여 직접 또는 교과서를 통해서 수학계에 끼친 영향은 크다. 특히 함수론 분야에서는 그의 문하에서 F.이베르센, P.J.미르베르크, 네반리나 형제, 알포르스 등 현대 함수론에 있어서의 세계적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매클로린(1698.2~1746.6.14)

영국의 수학자. 스코틀랜드의 킬모든 출생. 15세에 글래스고대학을 졸업, 19세에 애버딘의 매리셜 칼리지 수학 교수가 되었으며, 1725년 에든버러대학 교수가 되었다. 뉴턴의 학통을 이어, 플럭션법을 연구, 미분학에 이바지하고, 이것을 기하학에 응용하였다. 급수전개에 관한 ‘매클로린의 정리’를 발견하여 저서 《유율법(流率法)》(42)을 기술하였으며, 이 책에는 조석(潮汐)의 이론 등도 포함되어 있어 물리학에도 이바지하였다.

 

멀리스(1996.7.5)

영국의 수학자·경제학자. 스코틀랜드 미니개프 출생. 1957년 에든버러대학과 63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컬리지에서 각각 석사 학위와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69~95년 옥스퍼드대학에서 강의를 한 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제학 교수인 W.S.비크리 교수의, 정보가 불완전하거나 불균형한 상황하에서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분석적으로 연구한 이른바 ‘비대칭 정보하에서의 유인’이라는 이론에 대한 이론적 창의성을 보완하는 등, 비크리의 경제이론을 수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설명해 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비크리와 함께 96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메넬라우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생. 98년 로마에 천문대를 건립하였다. 저서로, 원의 현에 관한 저작(6권)이 있었다고 하나 없어지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아라비아어·헤브라이어·라틴어 등으로 번역된 《구면학(球面學):Sphaerica)》(3권)이 있다. 이것은 구면삼각형을 취급한 것으로, 유클리드의 평면삼각형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1권에는 구면삼각형의 개념과 정의 등이 있고 제2권은 천문학의 입장에서 구면학을 취급하였으며, 제3권에는 ‘메넬라우스의 정리’를 비롯하여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 제6권과 유사한 비례의 제명제(諸命題)가 있다.

 

몽주(1746.5.10~1818.7.28)

프랑스의 수학자. 본 출생.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소화(消火) 펌프·측량기 등을 만들었으며, 16세 때 리옹에서 물리학 교사가 되었다. 그 뒤 육군 공병학교 재학 중에 축성(築城)에 관한 문제를 종래의 산술적인 계산으로 풀지 않고 자기가 안출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짧은 시간에 풀어 교관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의 기원인데 당시에는 프랑스의 군사기밀로서 15년간이나 공개되지 않았다. 1780년 파리대학에서 수력학(水力學)을 강의하였고, 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군수품 생산기술과 조직에 진력하였으며, 새로운 도량형의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92년 혁명정부의 해군상(海軍相)이 되었고, 그의 제안으로 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창설되자 그 곳의 중심 멤버로 활동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나폴레옹의 신임과 우대를 받아 이탈리아·이집트 등의 원정에 참가하였으며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학회를 창립하였다. 왕정복고 후에는 당국의 손길을 피해야 했고 학사원에서도 추방당하여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다. 주요저서 《화법기하학:G럒m럗rie descriptive》이 95년 간행되었고, 같은해에 《기하학에의 해석학(解析學)의 응용:Application d’analyse ?la g럒m럗rie》도 간행되어 오늘날의 적분기하학(積分幾何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뫼비우스(1790.11.17~1868.9.26)

독일의 수학자·천문학자. 프로이센 출생. 라이프치히·괴팅겐·할레 등지의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고, K.F.가우스의 문하생이 되었다. 1815년 라이프치히대학 천문학 교수, 44년 동 대학 천문대장이 되었다. 천문학 이외에도 기하학·역학 등을 연구하여 업적을 남겼다. 기하학에서는 동차좌표(同次座標)의 일종인 중심좌표를 처음으로 도입한 업적으로 유명해졌다. 주요저서로는 《중심해석(重心解析)》(27)이 있다.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의 기초를 굳혔으며, 직선기하학 연구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면(面)의 표리(表裏)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민코프스키(1864.6.22~1909.1.12)

독일에서 활동한 러시아 출신의 수학자. 리투아니아의 코브노 근교 출생.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무렵부터 D.힐베르트와 평생에 걸친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1895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고, 96년 취리히대학, 이어서 1902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겼다. 정수론에 기하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연구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민코프스키의 시공세계(時空世界)’ 즉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4차원적 시공(時空)의 기하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대성이론의 시간·공간개념을 논하였고, 또한 물리법칙의 로렌츠군(群)에 대한 불변성을 해명하여 상대성이론의 형성에 공헌을 하였는데, 4차원세계의 기하학은 그 묘상화에 기여를 한 것이었다. 주요저서로 《수의 기하학:Geometrie der Zahlen》(1896) 《디오판토스 근사론(近似論):Diophantische Approximationen, eine Einf웘rung in die Zahlentheorie)》(1907) 《공간과 시간:Raum und Zeit》(1909) 등이 있다.

 

밀른(1896.2.14~1950.9.21)

영국의 천문학자·수학자. 헐 출생.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1920년 케임브리지대학 태양물리천문대 부대장, 22년 천체물리학 강사, 25년 맨체스터대학 응용수학 교수, 28년부터 사망시까지 옥스퍼드대학 수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초기에는 항성대기의 열전리(熱電離) 이론을 연구하고, 29년 이후 항성의 내부구조론을 연구하여, 완전기체에 의한 에딩턴의 항성모형을 비판하고, 축퇴(縮退)가스에 의한 백색왜성 이론을 전개하였다. 한편, 우주론에서는 우주팽창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기초를 둔 우주공간에 대하여 균일성·등방성을 전제로 하는 뉴턴운동학에 의한 우주모형을 구상하여 《운동학적 상대론》(1948)으로 발표하였다.

 

바나흐(1892.3.30~1945.8.31)

폴란드의 수학자. 크라쿠프 출생. 1922년 루보프대학 강사가 되었고, 27∼45년 동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함수해석(函數解析)을 연구하여 위상공간(位相空間)의 이론을 창시·발전시켰다. 그는 벡터의 크기 개념을 확장한 놈을 통하여 거리를 도입한 바나흐공간으로 알려진 놈(norm) 선형공간의 개념으로 유명하다. 주요저서에 《선형연산론:Th럒rie des op럕ations lin럂ires》(1932)이 있다.

 

바이어슈트라스(1815.10.31~1897.2.19)

독일의 수학자. 바이에른주(州) 오스텐펠데 출생. 1834~38년 본대학에서 상업과 법률을 배운 뒤 뮌스터대학에서 C.구더만에게 사사하여 타원함수론을 연구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가톨릭 계통 김나지움의 교사직을 맡으면서 수학관계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고, 56년 베를린대학의 초빙을 받아 교수로서 종신토록 재직, 항상 용의주도하게 준비된 강의로 성가(聲價)를 높여 많은 청강생이 모여들었다. 김나지움 시대에는 초타원적분(超楕圓積分)·아벨함수, 나아가 대수적 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발표한 복소변수의 해석함수(解析函數)에 대한 개념은 G.리만의 개념과 자주 비교된다. 바이어슈트라스가 엄밀한 해석적 표현을 중시한 데 반하여 리만은 기하학적·물리학적 직관에 의존하였다. 최대의 공헌은 멱승수(冪乘數)로서 복소함수이론의 기초를 이룬 일이다. 이는 J.L.라그랑주의 미적분 대수화(代數化)를 복소평면에서 더욱 완전하고 엄밀하게 기초를 이룩하고 다시 이를 발전시킨 것이다. 어떤 수렴원(收斂圓) 안에서 멱승수로서 전개되는 함수의 값을 다시 해석접속(解析接續)으로써 이를 확장하였다. 그의 엄밀성은 모든 연구결과에 나타나, 변분법(變分法)의 연구, 동일수렴(同一收斂)의 발견, 도처에서 미분할 수 없는 연속함수의 제시 등 그 이후의 수학의 엄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바일(1885.11.9~1955.12.8)

독일의 수학자·이론물리학자. 엘름스호른 출생. 1908년 괴팅겐대학을 졸업, 적분방정식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취리히 공과대학 교수, 괴팅겐대학 교수, 프린스턴대학 객원 교수를 역임하고, 34년 이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렴하였다. 업적은 수학·이론물리학의 기본적 연구에서부터 과학전반에 이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적분방정식, 리만면(面) 등의 해석학 연구, 무리[群]의 표현, 특히 콤팩트군(群)·반단순(半單純) 리군(群)의 표현론, 또한 군론(群論)의 지식을 널리 이용한 양자역학의 연구, 미분기하학, 수학기초론의 연구 등이 있는데, 특히 유리형함수(有理型函數)와 해석곡선(解析曲線)과의 관계를 밝힌 선구적 업적을 발표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저서로 《수학과 자연과학의 철학》 《시메트리》 등이 있다.

 

배로(1630.10~1677.5.4)

영국의 수학자·신학자. 런던 출생.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다녔다. 파리·이탈리아·콘스탄티노플에서 고전을 연구하고 1659년 귀국하여 사제가 되었으며, 60년 케임브리지대학의 그리스어(語) 교수로 임명되었다. 63년 수학의 루커스 교수직이 신설되자 초대 교수가 되었으며, 여기서 행한 광학(光學)과 기하학의 강의로 뉴턴에게 영향을 주었다. 69년 뉴턴에게 교수직을 물려주고 신학에 전념하기로 했으나, 70년 찰스 2세의 시승(侍僧)으로 뽑혔고, 이어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이 되어(71)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수학연구에 있어서는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등의 고전적 저작의 해석에 주력하는 한편, 광학과 기하학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개척하였으며, 특히 페르마의 접선법의 발전과 미분·적분이 서로 역관계에 있다는 증명은 미적분학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서 유명하다. 열렬한 왕당파(王黨派)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케임브리지 플라톤파(派)에 속하여,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주장하였다.

 

버코프(1884.3.21~1944.11.12)

미국의 수학자. 하버드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프린스턴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세기 말경부터 J.H.푸앵카레, S.리야프노프 등이 정성적(定性的)·위상적 방법을 도입하여 크게 발전시킨 미분방정식론을 연구하였다. 정성적·위상적 방법을 계승하고, 푸앵카레가 못다한 정리도 증명하였으며, 1912년 역학계의 이론도 세워 이 분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31년에 제시한 ‘에르고드 정리’의 성립조건도 통계역학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하였다.

 

베르누이(1654.12.27~1705.8.16)

스위스의 수학자. 바젤 출생. 처음에는 성직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수학을 독학하다가 여러 나라의 여행을 계기로 수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1682년부터 바젤대학에서 물리학을 강의하였고, 이어 86년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 후 84년 발표된 G.W.라이프니츠의 논문을 보고 흥미를 느껴 동생 요한과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해석학을 전개하여 등하강곡선(等下降曲線)을 발견하였다(90). 라이프니츠는 베르누이 형제가 자기와 함께 미적분학의 건설자라고 말하고 있다. 베르누이는 나중에 동생과 사이가 나빠져, 요한이 제출한 최속강하선(最速降下線)의 문제를 푸는 동시에 등주(等周) 문제를 제출하는 등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그들은 99년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첫 외국인 회원으로 형제가 모두 뽑혔으며, 또 1701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 밖에 급수에 관한 업적, 확률론에 대한 공헌(여기에는 베르누이數와 대수의 법칙과 관련된 베르누이의 정리가 포함된다), 진자(振子)의 진동중심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유저로는 《추론의 예술 Ars Conjectandi》(1713)가 있다.

 

베르누이(1667.8.6~1748.1.1)

스위스의 수학자. 바젤 출생.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으며, 다시 의학을 공부하여 그 학위도 받았다(1694). 그러는 한편 수학에도 흥미를 가져, 87년경부터 형 야콥과 협력하여 해석학을 연구하였고, 그 전개에 공헌하였다. 90년부터는 파리에 머물며 ‘무한소해석(無限小解析)’‘적분법’을 체계적으로 강의하였다. 95년 그로닝겐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형이 사망한 후로는 바젤대학에 초빙되었다(1705). 급수의 연구, 최속강하선(最速降下線)에 대한 문제 제출 등이 있은 후, 해석학을 물리학에 응용하는 문제에 관심을 돌려 실체진자(實體振子)를 다루었으며, 또 역학에 있어서의 가상변위(假想變位)의 원리를 정식화하였고, 뿐만 아니라 역학에서의 활력의 개념을 주장하여, 라이프니츠를 옹호하였다. 후계자 육성에도 주력하였는데, 18세기의 대수학자 L.오일러도 그의 제자였다.

 

베르누이(1700.1.29~1782.3.17)

스위스의 물리학자·수학자. 네덜란드 그로닝겐 출생. 베르누이가(家)의 요한 베르누이의 아들이다. 17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이어 33년 바젤대학 식물학·해부학 교수를 거쳐 50년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50). 확률론 연구 등 수학 분야의 업적도 있지만, 물리학 분야에서의 공헌이 크다. 오르간파이프의 공기진동(空氣振動)·탄성현(彈性弦)·탄성곡선 연구가 있으며, 강체(剛體)운동에서 병진운동과 회전운동의 분리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특히 활력(에너지)의 이론을 추진, 그 보존원리(역학적에너지보존법칙)를 보편화하였다. 그와 같은 생각은 유체를 다루는 데도 활용되었으며, 38년 쓴 유명한 저서 《유체역학(流體力學)》에서는 ‘베르누이의 정리’를 논술하여, 유체역학의 정식화(定式化)를 시도했다. 또 열(熱)의 본성에 관해서는, 그것이 분자의 운동에 의한다는 설을 주장하여 기체분자운동론의 선구자가 되었고, 기체법칙(보일의 법칙)을 도출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이 되었다.

 

베블런(1880.6.24~1960.8.10)

미국의 수학자. 아이오와주(州) 데코라 출생. 프린스턴대학의 교수(1910∼32)로 있다가 1932년부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일원이 되었다. 미분기하학의 연구자로, 특히 ‘길[道]의 기하학’을 연구하여 바일이 발견한 아핀 접속(接續)의 사영변환을 검토하였고, 그 변환에 대하여 불변의 기하학(사영기하학이라 정의됨)을 전개하여 사영 접속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사영기하학과 G.F.B.리만기하학의 유사성을 해명한 공헌은 크다.

 

벨트라미(1835.11.16~1900.2.18)

이탈리아의 수학자. 피사대학·볼로냐대학·로마대학의 교수를 거쳐 1876년 파비아대학 교수가 되었다. 미분기하학을 연구하여 로바체프스키 기하학과의 관련을 평면에의 사상을 통하여 포착하고, 의구면(擬球面)의 내부기하학이 로바체프스키의 쌍곡평면 내부기하학과 동형임을 제시하였다. 68년의 논문 《비유클리드기하학의 해석 시론》에 기술한 이 내용은 로바체프스키 기하학의 무모순성을 나타낸 것으로서 비유클리드기하학의 진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밖에 ‘탄성체의 휨’에 관한 연구도 있다.

 

보어(1887.4.22~1951.1.22)

덴마크의 수학자. 코펜하겐 출생. 물리학자 N.H.D.보어의 동생으로 17세 때 코펜하겐대학에 들어가 해석학·수론(數論)을 배웠고, 덴마크공과대학과 코펜하겐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독일 괴팅겐대학과 미국 대학의 객원 교수로 자주 초청되었다. 국제수학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뉴욕에 머물던 중 병을 얻어서 코펜하겐으로 돌아와 죽었다. 젊었을 때 이미 디리클레급수·리만함수·ζ함수를 연구한 지도적인 해석학자였다. 1914년 ζ함수에 관한 ‘보어-란다우의 정리’를 세웠고, B.옌센과 ζ함수의 a점 분포를 공동연구하여 근대 해석학의 중요 부분을 형성한 공로가 크다. 죽은 뒤에 《보어 전집》이 덴마크 수학회에서 간행되었다.

 

볼차노(1781.10.5~1848.12.18)

체코의 철학자. 프라하 출생. 그곳에서 신학·철학·수학을 공부한 다음 1805년 성직자가 되었다. 동시에 프라하대학의 철학적 종교론 교수가 되었으나, 이단을 선전하였다는 혐의로 19년 면직당했으며, 출판금지 처분도 받았다. 독일 관념론에 반대하여 객관주의적이며 비역사적인 논리학의 구상을 전개하여, 뒤에 E.후설의 현상학(現象學)에 영향을 끼쳤다. 주저로는 《아타나지아:Athanasia》(1827) 《지식학:Wissenschaftslehre》(4권, 47) 《무한의 역설:Paradoxien des Unendlichen》(51) 등이 있다.

 

볼테라(1860.5.3~1940.10.11)

이탈리아의 수학자·물리학자. 안코나 출생. 1883년 피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이어 토리노대학(1893)을 거쳐 로마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1900). 수리물리학의 문제에 관한 업적이 있으며, 탄성이론에서 편미분방정식을 연구하였다. 변분(變分) 문제와 관련하여 N.H.아벨이 만든 방정식을 일반화하고, 이른바 ‘볼테라의 적분방정식’을 연구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해석함수의 다가성(多價性)이 가산적인 데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 ‘프앵카레-볼테라의 정리’ 등도 있으며, 현대수학의 중요한 분과인 위상해석학에서 선구적인 공헌을 하였다.

 

불(1815.11.2~1864.12.8)

영국의 수학자·논리학자. 링컨 출생. 빈민 자녀들을 위한 내셔널 스쿨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라틴어·그리스어를 독습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초등학교에서의 수학교육에 의혹을 느낀 것이 계기가 되어 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P.S.M.de 라플라스의 《천체역학》, J.L.라그랑주의 《해석역학》을 익힌 후 변분법(變分法)에 관한 하나의 발견에 도달하였고 계속하여 불변식론(不變式論)을 연구하여 중요한 성과를 얻었다. 그는 이를 《케임브리지 수학잡지》에 기고하여 많은 수학자를 알게 되었고, 대수학 전개의 중요한 일익을 맡은 영국학파 속에서 그 지위를 굳혀나갔다. 1849년 퀸스칼리지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의 창시와 논리대수(Boole 代數)의 전개였다. 논리 또는 추론을 수학적으로 다루려고 한 이 연구는 마침내 《논리와 확률의 수학적 기초를 이루는 사고(思考)의 법칙 연구:An investigation into the laws of thought on which are founded the mathematical theories of logic and probabilities》(1854)라는 불후의 노작(勞作)으로서 결실을 맺었다.

 

브로우베르(1881.2.27~1966.12.2)

네덜란드의 수학자. 1913년 이래 암스테르담대학 교수로서, 위상기하학과 수학기초론상의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위상기하학에 대해서는 10년대 초에 공간차원의 위상적 정의를 부여하였고, 사상도(寫像度)의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또한 ‘브로우베르의 부동점정리(不動點定理)’를 증명하였다. 그가 사용한 수법은 집학론적 위상기하학에 대수적 방법을 적용하는 기초를 만들었다. 수학기초론상의 업적을 발전시키기 시작한 것은 20년경부터이다. D.힐베르트 등의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수학의 기초는 자연수열의 직관에 있다고 하여, 직관의 기초가 없는 곳에 배중률(排中律)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에 의해 그는 수학적 기초론에서 직관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수학은 학문(Lehre)이기 보다는 오히려 행위(Tun)이다’라고 한 그의 말은 그러한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비노그라도프(1891.9.14~1983.3.20)

소련의 수학자. 가법적 정수론의 권위자로 유명하다. 어떤 종류의 삼각합의 평가에 관하여 독특한 기교를 고안하였고 유효 적절한 서클메소드를 창설하였다. C.골트바흐와 L.오일러 사이에 오고간 서한 속에 제기된 양의 정수를 소수의 합으로 나타내는 문제(1742)에 대해서는, 1937년 충분히 큰 홀수는 많아야 3개의 소수(素數)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E.웨링이제시한 유명한 문제(1770)에 대해서는 47년에, 충분히 큰 자연수는 기껏 3n(log n+11)개의 자연수의 n승멱의 합으로서 표시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 외 해석적 정수론의 여러 분야에 끼친 공으로, 스탈린상을 받기도 하였다.

 

비에트(1540~1603.12.13)

프랑스의 수학자. 퐁트네르콩트 출생. 변호사로서 일하면서 수학을 연구하였다. 후일 앙리 3세와 4세를 섬겨 궁정 고문관이 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삼각법의 개선에 노력하였으나, 나중에 대수학의 계통화에 착수하여, 1591년부터 투르에서 간행하기 시작한 《해석학입문》에서 그 새로운 대수학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대수가 기호적으로 다루어지고, 간약(簡約)의 원리가 사용되었으며, 3차방정식을 중심으로 한 방정식의 일반적 취급이 제시되었다. 대수학을 기하학과의 관련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가령 방정식의 근과 계수 사이의 관계를 통찰하면서도 양의 근[正根] 이외는 버리는 등, 문제의 전면해결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한편으로는 17세기 해석기하학 전개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비오(1774.4.21~1862.2.3)

프랑스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 파리 출생. 1795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이공과대학)에서 배우고, 97년 보베대학 수학교수, 1800년 콜레주 드 프랑스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라플라스의 천체역학 해석》의 저자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1803년 자연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804년 게이뤼삭과 함께 기구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 대기(大氣)에 대한 여러 현상을 연구했으며, 1806년 경도국(經度局)에서 일하면서 D.F.J.아라고와 함께 에스파냐로 가서 자오선(子午線)을 관측하였다. 1806년 파리대학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전자기현상을 연구하여, 20년 전류의 자기작용(磁氣作用)에 대한 ‘비오-사바르의 법칙’을 발표했다. 광학(光學)에서는 니콜이 만든 프리즘을 이용해서 수정(水晶)의 광학작용을 연구, 원편광(圓偏光)과 쌍축결정(雙軸結晶)을 발견했다. 용액을 포함한 많은 물질에 대하여 실행한 편광면(偏光面)의 회전에 관한 연구는, 우회전성·좌회전성의 관찰에까지 미쳤으며 광학의 진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실험물리학과 수학논문집:Trait?de physique exp럕imentala et math럐atique》(1816)이 있다.

 

사케리(1667.9.5~1733.10.25)

이탈리아의 수학자. 밀라노의 예수회 신부로 파비아의 예수회 신학교 교수이며 비유클리드기하학의 선구자이다. 18세기 초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에 의한 기하학의 기초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유클리드의 공리계, 특히 평행선의 공준에 대해 비판적인 논문을 많이 썼다. 그 중 사케리가 죽은 해에 나온 《모든 결점이 제거된 유클리드》는 J.H.람베르트의 논문 <평행선론> 등에 큰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에 들어서자 J.보여이, N.I.로바체프스키 등의 비유클리드기하학으로 발전하였다.

 

샤를(1793.11.15~1880.12.12)

프랑스의 수학자·수학사가. 1841년부터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수로 측지학(測地學)·역학을 가르쳤다. G.데자르그, B.파스칼의 시대에 싹이 나서 파리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J.V.퐁슬레에 의하여 정식화된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에 대하여 그 사영적 성질과 개량적인 성질의 대응관계를 부여하는 문제를 연구하여 ‘대응원리’를 세워 종합적인 방법을 전개하였다. J.슈타이너(1796∼1863)와 함께 근세 종합기하학의 건설자로 지목받았다. 수학사가로서는 묻혀 있던 데자르그의 자료를 발굴하여 그를 재평가하였고, ‘유클리드의 서(書)’의 복원 등이 알려져 있다. 저서에 《기하학에 있어서 방법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개관:Aper뛳 historique sur l’origine et le developpement des methodes en geometrie》(1837) 《기하학의 진보:Rapport sur les progr쨞 de la geometrie》(71) 등이 있다.

 

세베리(1879.4.13~1961.12.8)

이탈리아의 수학자. 이탈리아학파(學派)의 지도자로서 대수곡선·대수곡면 및 이들을 일반화한 대수적 다양체의 일반이론을 다루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이 방면에 뛰어난 학자가 많이 나왔다. 세베리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특히 대수적 대응의 개념을 구사하여 많은 결과를 얻었다. 이탈리아학파의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아 치밀성이 결여된 경우도 많으나 이 방면에서 많은 학자를 양성했다. 1905년 파도바대학 교수, 21년 로마대학 교수, 이어서 이탈리아 아카데미 회원, 고등수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 이탈리아 수학계의 최고 지위에 있었다.

 

쉬케(?~?)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출생. 1500년경 르네상스시대에 최초로 대수학서를 집필하였다. 파리대학을 나와 리옹에서 의사로 일했다. 《수의 과학에 있어서의 세 부분:Le triparty en la science des nombres》을 저술했다. 이 책은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유리수의 계산을 다루면서 합리적인 계산법과 인도, 아라비아수들을 설명해 놓았다. 2부는 무리수, 3부는 방정식으로, 가장 핵심 부분인 3부는 현대의 대수를 다루고 있다. ‘플러스’, ‘마이너스’라고 말로 표현했던 것을 ‘p聖? ‘m’이라는 기호를 사용하였고, 미지수의 거듭제곱에 대한 간편한 표기법을 고안하였다. 또한 명수법의 문제도 해결하였다.

 

슈바르츠(1843~1921)

독일의 수학자. 1867년 할레대학, 69년 취리히대학, 75년 괴팅겐대학의 교수를 역임하고, 92년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다. 편미분방정식의 해석적 이론 연구에서는 ‘슈바르츠의 함수’를 논하고, 변분법(變分法)에서는 리만의 존재정리(存在定理)의 증명에 성공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화함수론(調和函數論)의 경계값 문제에서는 교대법(交代法)을 안출하였는데, 이것은 실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이론적 의의도 지니는 것이었다. 그 밖에 급수(級數)의 수렴성(收斂性)을 논하고, 이른바 ‘슈바르츠의 적분부등식(積分不等式)’을 제출하는(1905) 등 해석학의 여러 방면에 걸쳐 공헌하였다.

 

슈바르츠(1915)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분포이론을 통하여 미분개념을 확장하였으며 이후의 측도이론(measure theory)과 적분개념의 확장을 유발시켰다. 그 결과 해석학과 분포이론의 밀접한 관련성을 입증하였다. 종전의 해석학은 연속함수를, 분포이론은 이산함수를 주로 다루었다. 주요저서에 《분포 이론:Theorie des distributions》(1950∼51)이 있다.

 

슈타우트(1798.1.24~1867.6.1)

독일의 수학자. 1835년 에를랑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J.슈타이너와 M.샤를이 전개한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의 일면을 발전시켰으며, 도형의 사영적인 성질은 그 어떤 계량(計量)과도 관계없이 논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량을 포함하지 않은 위치관계만을 끌어낸 위치기하학을 창설하였다. 56년에서 60년에 걸쳐 공간(公刊)된 《위치기하학에 대한 기여(寄與):Beitr둮e zur Geometrie der Lage》에서 사영기하학에서의 허요소(虛要素:虛線·虛平面)를 기하학에 도입하여 여러 가지 좋은 결과를 얻은 바 있지만, 서술방법이 너무 간략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학계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T.라이에가 《위치기하학:Geometrie der Lage》(1868)을 간행하여 소개한 후부터의 일이다.

 

슈타이너(1796.3.18~1863.4.1)

스위스의 수학자. 벽촌의 빈곤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까지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18세에 대교육가인 페스탈로치를 만나는 행운을 입어 이베르돈의 학교에 들어가 수학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18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 들어갔고, 다시 베를린에 나가서 가정교사와 학교교사로 근무하면서 수학을 연구하다가 A.훔볼트에게 인정받아 베를린공업대학에 자리를 얻었으며, 34년 훔볼트와 K.G.야코비의 추천으로 베를린대학의 기하학 교수가 되었다. 뛰어난 순수기하학자로서, 여러 가지 도형의 상호 관련을 계통적으로 논하여 종합기하학의 체계를 세웠다. ‘쌍대원리(雙對原理)’의 1차변환이나 사영변환(射影變換)에서 전개한 연구는 사영기하학·대수기하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기하학에 해석적 방법의 도입은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요소(虛要素)를 채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스테빈(1548~1620)

네덜란드의 수학자·물리학자·기술자. 스테비누스라고도 불린다. 벨기에의 브뤼주 출생. 브뤼주 시청에 근무하였으며, 후에 네덜란드 군대의 경리부장이 되었다. 그의 과학적 연구는 여러 방면에 걸친 것이었으며, 문학적·군사적인 양면의 기술자로서도 활약하였고, 특히 축성(築城)기사로서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1582년 이자 계산표의 서적을 출판하여, 상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얼마 후에 《10분의 1에 관하여:De Thiende》(1585)라는 소책자에서 소수(小數)의 계산에 관한 최초의 조직적인 해설을 하였다. 여기서 소수(십진 분수)의 표기법과 계산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이것의 사용을 장려하여 계산술 진보에 이바지하였다. 다소 복잡한 이 표기법은 훗날 비에타에 의해서 개량되었는데, 그가 정부에 진언하였던 십진법에 의거한 화폐 및 도량형 제도는 프랑스 혁명에 이르러 겨우 실현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응용 산술》이라는 저서에 간추려져 있다. 그의 최대의 공헌은 역학 분야의 업적으로서, 이른바 아르키메데스적인 정역학(靜力學)은 스테빈에 의하여 대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균형의 원리》(86)에서는 고체의 정역학과 유체의 정역학이 다루어졌으며, 또한 도르래의 이론을 전개하여 가상(假想) 변위의 원리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영구 운동이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하여, 빗면에 관한 균형의 조건을 음미하였고, ‘힘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을 발견한 공적은 매우 크다. 이 밖에 정수압(靜水壓)에서 수압기(水壓機)의 가능성을 예상하였고, 부체(浮體)의 균형을 다루기도 하였다. 훗날 네덜란드의 수륙 영선(營繕) 최고 감독관의 지위에 올랐다.

 

스토크스(1819.8.13~1903.2.1)

영국의 수학자·물리학자. 아일랜드 스크린 출생. 1841년도 스미스상(賞) 수상을 계기로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고, 49년 교수로 취임, 평생 교직에 머물렀다. 89년 귀족의 작위를 받고 한때 왕립학회 회장직도 맡았으며, 럼포드상(52), 코플리상(93)을 비롯한 많은 수상 경력도 있다. 특히 그의 연구분야는 광범위하여, 수학에서 미분·적분방정식론 등에 공헌한 바 컸고, 또한 물리학에서도 유체역학·광학·음향 등의 이론적 전개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한편, 실험에도 재능이 있어 X선이 전자기파라는 결론과 형광체(螢光體)에서 나오는 빛의 파장에 관한 ‘스토크스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흡수스펙트럼과 자외선부의 스펙트럼의 고찰에서 항성(恒星)의 물질 조성을 추측했으며, 이 밖에 점성(粘性) 유체 중에서의 물체의 낙하에 관한 ‘스토크스의 공식’이 있다.

 

스틸체스(1856~1894)

네덜란드 태생의 프랑스의 수학자. C.에르미트의 영향을 받아 1882년부터 해석학(解析學)을 연구하였고, 85년 파리로 이주한 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86년 발산급수(發散級數)의 취급, ‘스틸체스 적분(積分)’의 창시 등으로 유명해졌고, 해석학에 새로운 전망(展望)을 가져왔다. 또한 해석함수론(解析函數論)의 기본개념의 정비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고, 툴루즈대학 교수를 지냈다.

 

실베스터(1814.9.3~1897.3.15)

영국의 수학자. 런던 출생. 일찍이 소년기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으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A.드 모건의 지도를 받고 두각을 나타냈다. 15세에 리버풀 왕립지식보급회에 입회하여 2개의 상을 받았다. 1837년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41년 더블린대학에서 석사(碩士)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에 런던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영국학사원 회원으로도 선출되었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딛쳐 교수직을 2년 만에 물러났으며,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생명보험회사에 들어가 일하면서부터 수학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며, 46년 런던법학원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어 개업을 하였다. 이 때 변호사 A.케일리와 알게 되어, 10년간의 수학 공백기를 끝내고 재차 수학 세계로 되돌아와 케일리와 함께 대수적 불변식론(代數的不變式論)의 전개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행렬(行列)과 대수적 불변식의 기초 이론을 확립하여, 그 후의 과학이론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55년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6년간 재직한 후 정년 퇴직하고 시작(詩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동안에 저술한 것이 《시(詩)의 법칙》이다. 76년 미국의 존스 홉킨스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부임하였으며, 그 곳에서 《아메리카 수학잡지》를 창간하는 등 수학계에 공헌하였다. 85년 옥스퍼드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는데, 그 최초의 강의가 ‘미분불변식(微分不變式)의 이론’이었다. 업적은 불변식론의 개척과 소수분포(素數分布)에 관한 연구가 유명하며, 역학(力學)의 영역에서도 ‘1점의 둘레의 강체(剛體) 운동에 관한 정리’도 있다. 저서에 《The Collected Mathematical Papers of J.J.Sylvester》(4권,1904~12)가 있다.

 

아다마르(1865.12.8~1963.10.17)

프랑스의 수학자. 베르사유 출생. 에콜 폴리테크니크(파리 이공과대학) 및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고등 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보르도대학·소르본대학·콜레주 드 프랑스 등의 교수를 역임하고, 1912년 C.조르당의 뒤를 이어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수가 되었다. 해석학과 대수학, 특히 변분법(變分法)·급수론·해석함수론에서의 업적은 두드러지며, 소수분포(素數分布)에 관한 극한정리와 멱급수(冪級數)의 수렴에 관한 정리는 흔히 그의 이름을 붙여 불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 망명하여 전후에 귀국하였다. 주저에 《테일러급수와 해석접속(解析接續)》(1901) 《변분법 강의》(10) 등이 있고, 유체역학(流體力學)에 관한 명저 《파도의 전파와 유체역학》(1903)이 있다.

 

아르키메데스(BC 287?~BC 212)

고대 그리스 최대의 수학자·물리학자.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 출생. 천문학자 피디아스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부터 기술에 재능이 있어, 그가 만든 수력천상의(水力天象儀)는 극히 정밀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집트에 유학 중 나선(螺旋)을 응용해 만든 양수기는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식펌프’로 불리며, 지금도 관개용 등에 쓰이고 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이던 알렉산드리아의 대(大)연구소 무세이온에서 수학자 코논(Conon:BC 260년경 활약)에게 기하학을 배우고 시라쿠사로 돌아와 많은 수학서(數學書)를 썼다. 아르키메데스에 얽힌 일화 가운데는 그가 지렛대의 원리 응용에 뛰어난 기술자였다는 사실과 관계되는 것이 많다. 지렛대의 반비례 법칙을 발견한 그는 시라쿠사왕 히에론 앞에서 “긴 지렛대와 지렛목[支點]만 있으면 지구라도 움직여 보이겠다”고 장담하였다. 왕이 해변 모래톱에 올려놓은 군함에 무장병을 가득 태우고 이것을 물에 띄우라 하였더니,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를 응용한 도르래를 써서 이를 쉽게 해냈다. 또 하루는 왕이 갓 만든 금관을 구했는데, 그것이 위조물로 순금이 아니고 은이 섞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명하여 그것을 감정하라고 하였다. 생각에 골몰한 아르키메데스가 우연히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 물 속에서는 자기의 몸의 부피에 해당하는 만큼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을 문득 알아냈다. 흥분한 그는 옷도 입지 않은 채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알아냈다, 알아냈다(Heureka!, Heureka!)”라고 외치며, 집으로 달려가 그 금관과 같은 분량의 순금덩이를 물 속에서 달아 본즉 저울대는 순금덩이 쪽으로 기울어 금관이 위조품인 것을 알아내었다. 그는 이 원리을 응용하여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즉 위조왕관에는 은이 섞여 있어 같은 무게의 순금보다도 부피가 크고 따라서 그만큼 부력(浮力)도 커진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싼 3차에 걸친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 중 제2차 포에니전쟁(BC 218∼BC 201) 때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의 편을 들어 로마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게 되었다. 이 때, 아르키메데스는 이미 70세를 넘은 고령이었지만, 이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각종 투석기·기중기 등 지렛대를 응용한 신형무기를 고안하여 로마의 대군을 크게 괴롭혔다. 수년 후 시라쿠사가 함락되던 날,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기하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날 아르키메데스는 뜰의 모래 위에 도형을 그리며 기하학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중, 다가오는 사람 그림자가 로마 병사인 줄도 모르고 “물러서거라, 내 도형(圖形)이 망가진다”고 외쳤다. 그러나 로마병사는 그를 몰라보고 그의 목을 쳤다. 또 만년에 죽은 뒤 건립하도록 유언된 그의 묘에는 뜻밖에도 구(球)에 외접(外接)하는 원기둥의 도형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그가 고심 끝에 발견한 정리(定理)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부피는 그 구 부피의 1.5배이다”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다. 한편, 아르키메데스는 유클리드 등 다른 기하학자들과는 달리 기하학의 문제를 푸는 데도 역시 지렛대의 원리를 사용하였다. 즉 동질(同質)의 구와 원기둥을 만들고 이것을 저울에 달아 후자는 전자의 1.5배의 무게가 있음을 미리 알아 두고, 그 다음 이것을 귀류법(歸謬法)을 써 기하학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을 썼다. 같은 방법에 의한 다른 정리의 발견, 예컨대 포물선에 둘러싸인 넓이는 그와 동일한 밑변과 동일한 높이의 내접삼각형의 4/3배라는 것 등에도 사용되었다. 그는 기하학을 기술과 연결지은 학자로서 더 나아가 원주율이라든가, 우주의 크기를 나타내는 기수법(記數法) 등, 수학을 널리 실제문제 해결에 연결지음으로써 한층 더 그리스수학을 진전시킨 학자였다. 저작으로는 《평면의 균형에 대하여》 《포물선의 구적(求積)》 《구(球)와 원기둥에 대하여》 《소용돌이선[渦線]에 대하여》 《코노이드(conoid)와 스페로이드(spheroid)》 《부체(浮體)에 대하여》 《원(圓)의 측정에 대하여》 《모래 계산자(計算者)》 《가축문제(家畜問題) 기타》 등이 알려져 있다.

 

아리스타르코스(BC 310?~BC 230?)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수학자. BC 281∼BC 280년에 하지(夏至)의 관측을 하였고,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일주운동(日周運動)을 한다고 제창하였다. 또한 지동설(地動說)을 제창한 최초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지동설은 그 뒤 히파르코스 등에 의하여 부정되었다. 그는 항성의 겉보기의 부동성과 태양을 도는 지구의 회전궤도를 조정하기 위하여, 항성구(恒星球)는 지구의 궤도를 포함한 천구에 비하여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고 가정하였다. 즉 그가 생각한 우주는, 그 이전의 사람들이 생각한 우주보다 훨씬 컸다.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유일한 논문 <태양과 달의 크기와 거리에 관하여>는 본질적으로 기하학적 저술이지만, 이 속에서 3각법을 사용하고 몇 가지 가설을 마련한 뒤,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① 지구로부터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로부터 달까지의 거리의 18배나 되고, 20배보다는 짧다. ② 태양의 지름과 달의 지름의 비는 위와 같은 비율이다. ③ 태양의 지름과 지구의 지름의 비는 19:3 보다는 크지만, 43:6 보다는 작다. 이들 결과는 틀린 것이었지만, 그 방법은 옳았다. 시각(視覺)·빛·빛깔에 관하여도 저술하고, 개량 해시계도 발명했는데, 이 해시계의 바늘은 오목(凹)면구의 중앙에 세워져, 태양의 방향과 높이는 반구면(半球面)에 표시된 눈금으로 읽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벨(1802.8.5~1829.4.6)

노르웨이의 수학자. 오슬로 근교 핀드 출생.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세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과 싸우면서도 수학공부에 뜻을 두었다. 다행히 뒷날 《아벨 전집》을 편집한 친구 B.M.홀름보에의 도움으로 크리스티아니아대학(지금의 오슬로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9세 때에는 그때까지 약 3세기 동안 수학상의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던 5차방정식의 대수적 일반해법(代數的一般解法)을 연구하여, 그 불가해성(不可解性)을 증명하였다. 아벨은 5차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자비(自費)로 인쇄하여, 그 일부를 당시 수학계의 제1인자였던 K.F.가우스에게 보냈으나, 가우스는 그것을 읽어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1822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을 졸업한 아벨은 홀름보에의 주선으로 정부 보조금을 얻어 수학연구를 계속하였으며, 25년에 독일·프랑스로 유학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괴팅겐에는 가우스가 있었기 때문에 아벨은 괴팅겐을 피하여 베를린으로 갔고 거기에서 A.L.크렐레와 만나게 되었다. 크렐레는 아벨의 협력을 얻어 26년에 수학연구의 전문지인 《순수수학 및 응용수학 잡지》를 창간하고, 여기에 아벨의 논문을 게재하여 그 업적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아벨은 이어 프라이부르크, 드레스덴, 빈 등을 거쳐 이탈리아, 스위스, 파리로 갔으며, 그 동안에 ‘아벨의 정리(定理)’를 포함한 타원함수론을 써서 파리에 있는 프랑스 학사원(學士院)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이듬해 27년에 베를린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도 고생스러운 연구를 계속하여, 타원함수론에 관한 우수한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29년 1월 신병이 악화되어 건강이 극도로 나빴으나, 프랑스 학사원에 제출했던 당시 아직 발표하지 않은 논문의 사상을 발전시켜 대수함수(代數函數)에 관한 ‘아벨의 정리’를 증명한 유명한 논문을 써서 베를린의 크렐레에게 보였다. 이 무렵에야 그의 업적이 수학계에 알려져 높이 평가되었고, 베를린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초대장이 도착되기 이틀 전에 아벨은 26세의 불행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이름은 ‘아벨의 적분(積分)’ ‘아벨의 정리’ ‘아벨방정식’ ‘아벨군(群)’ 등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많은 수학용어 속에 살아 있어, 수학계 불후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아이젠슈타인(1823.4.16~1852.10.11)

독일의 수학자. 베를린 출생. 집안이 가난하여, 프로이센 왕실의 비호로 수학을 공부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재사(才士)로 소문이 나 1847년에 베를린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아깝게도 요절하였다. K.J.야코비, P.G.L.디리클레, J.슈타이너 등과 함께 베를린에 수학 전성시대를 형성하여 B.리만 등 준재를 배출하게 하였다. 스승인 K.F.가우스는 그를 아르키메데스, I.뉴턴에 버금가는 위대한 수학자로 꼽았다고 한다. 짧은 생애에 정수론(整數論), 불변식론(不變式論), 타원함수론 등 많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거듭제곱 잉여에 관한 ‘아이젠슈타인의 상호법칙’, 정수론이나 타원함수론에 쓰이는 ‘아이젠슈타인의 급수’, 유리정계수(有理整係數)의 다항식의 기약성(旣約性)에 관한 ‘아이젠슈타인의 정리’ 등에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붙여져 있다.

 

아폴로니오스(BC 262?~BC 200?)

그리스의 수학자. 소아시아의 페르가에서 태어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하였다. 저서 《원뿔곡선론[圓錐曲線論]》 8권은 고대 최고의 과학서 중 하나이다. 오늘날까지 최초의 4권은 그리스어(語)로, 다음 3권은 아랍어로 남아 있으나, 최후의 한 권은 일실되었다. 원을 밑변으로 하는 원뿔이라면 어떤 것이든 3개의 마디점[切面]이 생긴다고 하는 정의를 세웠다. 그리고 이 마디점들에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포물선·쌍곡선·타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의 일반화는 방법론상의 진보를 가져 왔고, 원뿔곡선으로 일괄하여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원뿔곡선의 특질과 응용은 그에 의하여 거의 마무리지어졌다. 또 행성(行星)의 운동에 관하여 ‘주전원설(週轉圓說)’과 ‘편심원설(偏心圓說)’도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이 밖에 ‘아폴로니우스의 원’도 유명하다.

 

알렉산드로프(1896~1982)

러시아의 수학자. 모스크바 출생. 위상기하학(位相幾何學)의 중심적 존재이다. 1913년 모스크바대학 수학과에 입학, 집합(集合)의 농도 문제(濃度問題)와 연속체 문제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한때 수학에 자신을 잃고 민중교육과 연극 등에도 종사하였으나, 20년부터 위상기하학을 연구한 끝에 우리손과 함께 위상기하학의 모스크바 학파를 창립하였다. 우리손이 죽은 뒤 그 학파의 핵심멤버로 활약하면서 폰트리야킨, 코르모그로프 등의 준재(俊才)들을 이 학파에서 배출시켰다. 독특한 공간이론을 세우고, 또 일반차원론의 기초 위에 조합적 위상기하학의 대수적 방법을 집합론적 분야에 이입(移入)시켜 위상기하학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모스크바대학 교수, 러시아과학아카데미 회원, 모스크바 수학회 회장을 지냈고 레닌 훈장을 받았다. 저서에 《조합적 위상기하학》(1947) 《일반집합론과 함수론 입문》(48) 등이 있다.

 

알콰리즈미(780~850)

알마문치세(813∼833)에 활약한 페르시아계 수학자·천문학자·지리학자인 당시의 최대 과학자. 이슬람교도로서, 아랍식 기수법(記數法)을 뜻하는 알고리즘(algorism)은 이 이름에서 전용된 것이다. 그리스와 인도의 지식을 종합하였으며, 그 산수는 아랍인과 유럽인에게 인도의 기수법을 소개하였다. 대수학 저서인 《복원(復元)과 대비의 계산》도 중요한 것으로, 거기에는 1차방정식과 2차방정식의 해석적 해법이 포함되어 있다. 또 2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해법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대수학을 뜻하는 영어의 algebra는 아랍어로 복원을 뜻하는 al-jabr에서 유래한다. 그의 천문표와 삼각법의 표에는 사인함수나 탄젠트함수도 포함되어 있다. 지구의 경·위도 측정에도 종사하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의 본문과 지도의 양쪽을 개정하여 《지구의 표면》이라고 개제하였다.

 

알포르스(1907.4.18)

핀란드의 수학자. 헬싱키 출생. 프랑스·독일·스위스에 유학하였고, 1930년 헬싱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36년 오슬로에서 개최된 국제수학자회의에서는 유리형함수(有理型函敷) 및 리만면(面)의 연구로 필즈상(賞)을 받았다. 헬싱키대학(1938∼44), 취리히대학(44∼46), 하버드대학(46∼78)의 교수를 역임했고, 미국 및 핀란드의 과학아카데미 회원이다. 학위논문은 <등각사상(等角寫像) 및 정함수(整函數) 이론의 연구>(1930)이다. 1907년 A.단조와가 “계수(階敷) ㉯?정함수가 n개인 유한점근치(有限漸近値)를 가진다면, 반드시 n???될 것이다”고 예상하였다. 학위논문에서 대상영역(帶狀領域)의 등각사상에 관한 새로운 왜곡정리(歪曲定理)를 사용하여 단조와의 예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각미계수(角微系敷)의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32년 기하학적인 새로운 방법으로 R.네반리나의 유리형함수론을 간결하게 하여, 33년에 ‘삼영역정리(三領域定理)’를 얻었다. 35년의 피복면(被覆面)의 이론 연구는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위상기하학(位相幾何學)에서의 고전적인 A.후르비츠의 공식을 계량적이며 위상적인 방법으로 확장하여 얻은 피복면의 주요정리에서 유리형함수의 이론을 도출한 논문이다. 리만면상의 아벨적분이론, 리만면의 분류, 준등각사상극치적(準等角寫像極値的) 길이의 이론 등에 관하여 중요한 기여를 했다. 주저에 《Complex analysis》(53) 《Riemann surfaces》(60) 《Conformal invariants》(73) 등이 있다.

 

야코비(1804.12.10~1851.2.18)

독일의 수학자. 포츠담 출생. 1825년에 베를린대학을 졸업하였고 43년까지 17년 동안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를 지냈다. 만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이탈리아에 체재하면서 정양했으며 훗날 베를린대학 교수를 지냈으나 이때는 별다른 업적이 없었다. 그의 강렬한 성격은 빈번히 사람들의 반감을 샀고, 또한 자유주의 사상가라는 입장도 당시 독일에서는 환영받지 못하였다. 수학상의 업적은 주로 쾨니히스베르크 시절의 연구 결과로서 타원함수의 이론을 전개하여, 이것으로부터 삼각법의 sin ? cos ? tan 슴?아주 비슷한 함수 sn x, cn x, dn x의 기초를 닦았다. 오늘날 야코비안이라고 불리는 함수행렬식은 그의 연구에 대해서 J.실베스터가 이름을 붙인 것이다. 42∼43년의 역학의 강의 중에서 훗날의 ‘해밀턴-야코비의 편미분방정식(Hamilton-Jacobische Partielle Differentialgleichung)’을 도입하였으며, 이 방정식은 양자역학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에라토스테네스(BC 273?~BC 192?)

그리스의 수학자·천문학자·지리학자. 큐레네 출생. BC 244년경에 아테네에서 이집트로 옮겨 BC 235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왕실 부속학술연구소의 도서관원이 되었다. 소수(素數)를 발견하는 방법으로서, 에라토스테네스의 체(코스키콘)를 고안하고, 정입방체(正立方體)의 배가(倍加)문제를 푸는 기구(器具:메소라본)를 발명하였다. 같은 자오선 위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시에네(현재의 Aswan)와 메로웨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여, 해시계로 지구 둘레의 길이를 처음으로 계산하였다. 그 결과 약 4만 5000 km(정확한 거리는 약 4만 km)라는 근사값을 얻었다. 저서 《지리학:Geographica》(3권)에는 지리학사·수리지리학(數理地理學) 및 각국 지지(地誌)와 지도 작성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지리상의 위치를 위도·경도로 표시한 것은 그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별의 목록을 포함한 논문도 썼고, 사학(史學)이나 언어학에 관한 저술도 남겼다.

 

에르미트(1822.12.24~1901.1.14)

프랑스의 수학자. 로렌주 디유즈 출생.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수학계를 이끈 거장으로서, 대수학(代數學)·해석학(解析學)의 분야에서 큰 공헌을 남겼고, 수론(數論)·불변식론(不變式論)·공변식론(共變式論)·정적분론(定積分論)·방정식론·타원함수론(楕圓函數論)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낭시에서 파리로 유학하여, 앙리 4세 중학에서 유명한 고등학교인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으로 진학했으나 학교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20세 때 파리 이공과대학에 진학했으나, 1년만에 그만두고 수학 연구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다. J.L.라그랑주의 수치방정식의 논문과 가우스의 《정수론(整數論) 연구》로 대수학을 공부했다. 그 후, 《신수학 연보(新數學年報)》 창간호에 실린 <5차방정식의 대수적 해법(代數的解法)>으로 독창성을 보였으며 이어 아벨함수로 관심을 돌려 K.G.J.야코비 등의 지우(知遇)를 얻어, 이 문제에 관한 그의 뛰어난 업적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파리 이공과대학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 34세에 학사원 회원, 이어서 에콜 노르말(1869) 및 소르본대학(70) 교수가 되어, 퇴직할 때까지 27년간 교직에 종사하였다. 그 동안 보렐, H.푸앵카레 등 많은 준재(俊才)를 기르고, 또 저작으로 수학계에 공헌하였다. 그의 아벨함수에 관한 최초의 이론은, 가우스의 수론(數論)의 기초 위에서 전개되었지만, 이것은 일찍이 가우스가 좌절하고, 아이젠슈타인이 착수한 일반적인 2차 형식의 수론적 연구에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형식의 이론’이 진척되어 ‘에르미트형식’의 연구가 되었지만, 이것은 그 후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대수적(代數的) 불변식론은 최고의 업적이라고 평가되며, 또 일반 5차방정식을 타원함수로 푸는 해법은 대수학·해석학에 새로운 분야를 열어, 푸앵카레의 보형(保型) 함수에 인계(引繼)되는 것이다. 그 밖에, 자연로그 한계(限界)의 초월성 증명도 있다.

 

에우독소스(BC408?~BC355?)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천문학자. 소아시아의 쿠니도스 출생. 피타고라스학파의 대학자인 아르큐타스에게서 기하학을, 의학은 테오메돈에게서, 철학은 플라톤에게서 배웠다. 아테네에서 연구하고 있다가 추방당하여, BC 381년 플라톤과 함께 이집트로 가서 1년 4개월을 지낸 후 귀국길에 플라톤과 작별하고 큐지코스에 머물러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당시의 여러 가지 수학상의 대문제를 연구하였으며, 주어진 정육면체의 2배의 부피를 가진 정육면체를 작도하는 문제(立方倍積問題)를 독자적인 방법으로 풀어서 무리수(無理數)에도 적용되는 일반 비례론을 세웠다. 또한 문제의 철저 검토법(method of exhaustion)에 의하여 평면기하학과 입체기하학의 여러 문제를 엄밀하게 증명하였다. 그의 업적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제5권에 정리되어 있다. 천문학 연구와 관련하여 구면상(球面上)의 곡선의 문제도 연구했다. 황금분할(黃金分割)의 이론을 발전시켜 각뿔과 원뿔의 체적에 관한 제정리를 증명하였고, 원의 넓이는 그 반지름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하였다. 천문학에서는 동심천구설(同心天球說)을 주장하여 과학적 우주상(宇宙像)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설은 행성·달·태양의 불규칙한 운동을 지구를 중심으로 한 27개의 천구의 회전운동의 결합으로 해명하려고 한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채용되었다.

 

오용진(吳龍鎭/1906~1983)

교육자·수학자. 호 석봉(石峰). 세례명 요한. 경북 출생.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1926년 대구고보(大邱高普:현 경북고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32년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대구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35년 이효상·최재복·김주석·서정섭·김용화와 ‘육우회(六友會)’를 조직, 선교와 문맹퇴치에 힘썼으며, 《천주교회보》를 간행하는 등 대구교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경북중학교장을 거쳐 48년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 교수로 부임, 71년 정년퇴직 때까지 경북대학교 대학원장·대한수학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75년에서 79년까지는 대구대교구 사제양성후원회 회장직을 맡아 교구 내의 사제양성에도 헌신하였다. 교육과 교회사업에 대한 공헌으로 70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74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평신도 사도직 수훈포상을 받았다.

 

오일러(1707.4.15~1783.9.18)

스위스의 수학자·물리학자. 바젤 출생. 주로 독일·러시아의 학사원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해석학의 화신(化身), 최대의 알고리스트(algorist:數學者) 등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수학·천문학·물리학뿐만 아니라, 의학·식물학·화학 등 많은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바젤대학에서 신학과 헤브라이어를 공부하였으나, 수학에서 J.베르누이의 관심을 끌어 곧 D.베르누이, N.베르누이와 사귀었다. 이와 같이 베르누이가(家) 사람들의 조언과 상트페테르부르크학사원에 간 베르누이 형제의 소개로, 처음에는 그 학사원의 의학부에 이어서 수학부에 적을 두었다. 40년 프리드리히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24년간 베를린학사원의 수학부장으로서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궁정에서의 인기가 떨어져 다시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청을 받자 6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후에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이 죽은 시기에 해당하여 해석기하학·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Introductio in Analysis Infinitorum》(1748) 《미분학 원리: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55) 《적분학 원리: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68∼70), 변분학(變分學: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대수학·정수론(整數論)·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도 삼각함수의 생략기호(sin, cos, tan)의 창안이나 ‘오일러의 정리’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베를린 시대에 프리드리히대왕의 질녀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계몽서로서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오트레드(1574.3.5~1660.6.30)

영국의 수학자. 수학 교수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저서 《수학의 열쇠:Clavis Mathematicae》(1631)에서 산술과 대수를 논하여 영국의 수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책은 수학기호의 역사상 중요한 것이며, 17세기 말경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수학기호의 ∼, 곱셈의 ×는 이 책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스위스의 뷔르기 방법을 개량한 생략 곱셈(오트레드 방법)을 안출했고, 또 계산자의 발명자로도 알려져 있다. 1657년의 《삼각법:Trigonometry》에서는 평면 및 구면(球面) 삼각법을 다루었고 sin, tan, sec의 기호를 사용하였다.

 

와이트먼(1922)

미국의 물리학자·수학자. 뉴욕주 로체스터 출생. 1942년 예일대학을 졸업, 49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51∼52년과 56∼57년 코펜하겐의 이론물리학연구소에 유학하였고, 60년 프린스턴대학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 교수가 되었다. 소립자(素粒子)의 현상론적 분석에서의 상대론적 불변성의 역할을 강조했고, 장(場)의 양자론의 수학적 기초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초함수론(超函數論)을 기초로 한 ‘와이트먼형식’을 제출했다. 공리론적(公理論的) 장(場)의 이론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며, 많은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했고, 구성적 장이론도 추진했다. 저서로 《PCT, Spin and Statistics and All That》(64년, R.F.스트리터와 공저)가 있다.

 

우마르하이얌(1040?~1123)

페르시아의 수학자·천문학자·시인. 카얌이라고도 한다. 니샤푸르에서 태어나 셀주크 왕조의 마리크샤왕(王)의 천문대를 운영하였다. 중세 최대의 수학자의 한 사람으로, 대수학에서는 회교도 가운데 태두(泰斗)로 숭앙된 학자이다. 2차방정식의 기하학적·대수학적 해법(解法)을 연구하고, 방정식에 대해서도 괄목할 만한 분류를 하였다. 예를 들면, 13종류의 3차방정식을 알아내어 그 해법을 시도하고, 그 대부분에 대해 부분적인 기하학적 해법을 확립하였다(단, 陰根은 고려하지 않았다). 1074년경에는 또 자라르 알 딘왕의 요청으로 새로운 역법(曆法)을 고안하였다. 그것은 《자라르 연대기》로 불리며 매우 정확하였다. 여가를 이용하여 근대 페르시아어로 4행시(루바이)를 썼는데, 그 가운데 250여 수가 《루바이야트》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의 4행시는, 그에 선행하는 같은 장르의 시인들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고 자유주의·합리주의에서 비롯된 무신론적 색채가 짙다.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않고 술과 꽃, 노래와 미녀를 사랑하며, 현재를 즐기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루바이야트》는 영국의 시인 E.피츠제럴드(1809∼1882)의 번역으로 유명해졌다.

 

월리스(1616.11.23~1703.10.28)

영국의 수학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직자가 되었으나, 점차 수학·물리학에도 관심을 가져 1649년 옥스퍼드대학의 기하학 교수가 되었다. 수학 이외에도, 천문학·역학(曆學)·역학(力學)·음향학·식물학·생리학·문법·음악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저술이 있으며, 암호해독에도 재능을 보이는 등 다재다능하였고, 뉴턴과도 친근하였다. 국왕 측근의 목사였으며, 로열 소사이어티 창설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수학에서는 F.B.카발리에리나 데카르트의 생각을 발전시켜 극한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다룬 한편, 미적분법(微積分法)에의 길을 연 《무한소산술(無限小算術)》(55)을 펴내고, 교묘한 귀납법으로 원주율(圓周率) 뭏?무한곱[無限乘積]으로 전개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또 원뿔곡선을 좌표에 의하여 해석적으로 논한 《원뿔곡선에 대하여》(55)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무한대에 대해 ∞의 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영국에서 최초의 수학사(73)를 저술하였으며, 물리학에서는 조석론(潮汐論)·공명(共鳴)·충돌(衝突) 등의 연구 업적이 있다.

 

위너(1894.11.26~1964.3.18)

미국의 수학자·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의 창시자. 미주리주(州) 컬럼비아 출생. 유대계의 언어학자 L.위너의 아들이다. 매우 조숙하여 9세에 고등학교, 14세에 하버드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18세에 학위를 받았다. 영국으로 건너가서 B.A.W.러셀에게 수리철학(數理哲學)을, G.H.하디에게 수학을 배운 후, 하버드대학의 철학강사·수학교수·제너럴일렉트릭사의 견습공·백과사전편집원·신문기자 등을 거쳐서 1924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들어가 32년 교수가 되었다. 수학에서는 실함수론(實函數論)·조화해석(調和解析)·급수론·확률론을 연구하였으며, 이 밖에도 물리학·전기통신공학·신경생리학·정신병리학 등 분야에도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위너 측도(測度)’를 기초로 하는 브라운 운동의 이론과, 후에 R.F.파이만이 확장하여 물리학에 널리 응용된 위너 적분론, 통신과 제어공학의 분야에 통일을 이룬 시계열(時系列)의 평활(平滑)과 예측의 이론, 필터의 이론 등은 획기적인 업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전기회로를 통하여 자동조절하는 자동조준의 연구에 종사한 일이 계기가 되어 48년 새로운 학문으로서 사이버네틱스를 제창, 동물과 기계에 있어서 제어와 통신을 통일적으로 취급하려고 시도하였고, 인간의 정신활동부터 사회기구에까지 미치는 통일과학을 세우려고 하였다. 주요저서로는 그 의도를 단적으로 나타낸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or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Animal and Machine》(48)이고, 기타 수학에 관한 많은 논문 및 자서전도 저술하였다.

 

유클리드(?~?)

BC 300년경에 활약한 그리스의 수학자. 그리스식 표기는 Eukleides. 그리스기하학, 즉 ‘유클리드기하학’의 대성자이다. 그의 일생에 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수학을 가르쳤다는 것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 그의 저서 《기하학원본(기하학원론 또는 단지 원론·원본으로 불리기도 한다):Stoikheia》(13권)은 플라톤의 수학론을 기초로 한 것으로, 그 이전의 수학(기하학)의 업적을 집성(集成)함과 동시에 계통을 부여하여 상당히 엄밀한 이론체계를 구성하였다. 기하학에 있어서의 경전적 지위(經典的地位)를 확보함으로써 유클리드라 하면 기하학과 동의어로 통용되는 정도에 이르고 있다. 그 밖에 현존하는 저서로는 《보조론(補助論)》 《도형(圖形)의 분할에 대하여》가 있으며, 응용수학서로는 《구면천문학(球面天文學)》 《광학(光學)과 반사광학》 《음정(音程)의 구분과 화성학입문(和聲學入門)》이 있다.

 

이선란(李善蘭/1810~1882)

중국 청(淸)의 수학자. 자 임숙(壬叔), 호 추인(秋).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출생. 어려서부터 수학에 뜻을 두어, 1845년 자싱[嘉興]에 체재하며 많은 수학자들과 교유하였다. 52년 상하이로 나와 A.와일리, J.에드킨스 등과 알게 되어 그들의 협조로 《기하학원본(幾何學原本)》 후반 9권, F.W.허셸의 《담천(談天)》과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 mathematica philosophiae naturalis》 등 많은 영미(英美)의 과학서를 번역하였다. 그 밖에도 자신의 저작이 4∼5가지 전하지만, 친구들의 저작을 편집한 《칙고석재산학(則古昔齋算學)》(13종 24권)도 유명하다. 68년부터 죽을 때까지 베이징의 동문관(同文館) 산학총교습(算學總敎習)의 자리에 있으면서 후진을 지도하였다.

 

이순지(李純之/1406~1465)

조선 전기의 수학자(數學者). 본관 양성(陽城). 자 성보(誠甫). 시호 정평(靖平). 음보로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 왕명으로 산법(算法)을 전공한 후 의상(儀象)을 교정하고 간의규표(簡儀圭表)·태평현주(太平懸珠)·앙부일구(仰釜日晷)·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었다. 57년(세조 3) 예조참판에 올랐고, 59년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으며 성격이 치밀하여 산학(算學)·천문(天文)·음양(陰陽)·풍수(風水) 등에 밝았다.

 

이치(李治/1192~1279)

중국 금말(金末)·원초(元初)의 수학자. 《원사(元史)》에는 이야(李冶)로 되어 있다. 자 인경(仁卿). 호 경재(敬齋). 허베이성[河北省] 롼청[欒城] 출생. 1230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대시인인 원호문(元好問)과도 교유하였으며, 《경재문집(敬齋文集)》(40권)을 남겼다. 처음에는 금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며 국사편찬에 종사하였으나, 금나라가 멸망하자 한때 산야를 유랑하였다. 원나라 세조(世祖)의 부름을 받아 61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취임하였다가 후에 봉룡산(封龍山)에 들어가 은둔생활로 여생을 마쳤다. 신수학(新數學)을 터득하여 천원술(天元術:代數計算法)을 상설(詳說)한 《측원해경(測圓海鏡)》(12권, 1248)을 저술하였고, 《익고연단(益古演段)》(3권, 59)도 펴냈다. 이 두 저술은 한때 세상에서 잊혀졌다가, 청조(淸朝)에 이르러 그 가치를 재평가받았다.

 

자리스키(1899)

미국의 수학자. 러시아의 코브린 출생. 키예프대학과 로마대학에서 대수·기하학을 공부한 후, 1927년 미국으로 건너가 존스 홉킨스대학의 교수(37∼45)가 되었고, 46∼47년 일리노이대학 수학연구 교수, 47∼69년 하버드대학 수학교수로 있다가, 69년부터 명예교수로 재직하였다. 대수 다양체(多樣體)의 기본군(基本群) 및 대수 곡면론(曲面論)에 관하여 저술하였고, 30년경부터 추상대수적 방법으로 전환, 대수기하학의 기초를 닦았다. 쌍유리변환론(雙有理變換論), 3차원까지의 대수다양체의 특이점환원(標數 0), 연결성정리(連結性定理), 유리곡면론(有理曲面論) 등 많은 업적이 있으며, 가환환론(可換環論)에 대해서도 국소환(局所環)의 해석적 정규성의 연구로 새 시대를 열었다. 주요저서로 《Algebraic Surfaces》(1935) 《Commutative Algebra》(58∼60, P.Samuel과 共著) 《Collected Papers》(72∼79) 등이 있다.

 

자이델(1821~1896)

독일의 수학자·천문학자. 1854년부터 뮌헨대학 수학 교수로 있었다. 여러 가지 항성(恒星) 및 행성(行星)의 광도(光度)에 대하여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고, 광학기계에 관해서 수리적(數理的)인 많은 연구를 하여 수차론(收差論)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자이델의 5수차(五收差)’의 연구, 불유계조건(不遊系條件)의 연구는 오늘날까지도 광학기계의 설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저서로 《Untersuchungen 웑er die gegenseitigen Helligkeiten der Fixsterne etc.》(1852) 《Untersuchungen 웑er die Lichtkr둭te der Planeten Venus, Mars, Jupiter und Saturn》(56) 등이 있다.

 

정대위(程大位/1533~1592)

중국 명나라의 수학자. 자 여사(汝思), 호 빈거(賓渠). 허난성[河南省] 신안현(新安縣) 출생.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좋아하여, 강남(江南) 등지를 여행하는 동안에도 진귀한 수학책을 보면 그것을 구하여 연구하였다. 1592년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수학을 편집하여 《산법통종(算法統宗)》(17권)을 간행하였는데, 그것은 《구장산술(九章算術)》의 형식에 따른 별로 독창성이 없는 통속 수학서이지만, 송(宋)·원(元) 시대에 발달한 방정식·마법진(魔法陣)·주산도 취급하고 있다. 이 책은 후세에 크게 유행하였고, 그 판본이 수십 종류에 이른다.

 

제르곤(1771.6.19~1859.5.4)

프랑스의 수학자. 기하학(幾何學)의 ‘쌍대원리(雙對原理)’를 누가 먼저 발견하느냐로 J.V.퐁슬레와 경쟁하였는데, 착수는 그에게 기선을 빼앗겼지만, 하나의 독립 원리로서의 정립 및 그 의의(意義)의 통찰에서는 그를 앞질렀다. 《순수 및 응용 수학 연지(年誌):Annales de math럐atiques pures et appliqu럆s》를 간행하였는데(1810∼31), 이것은 그 당시 유일한 수학 전문잡지였다.

 

조르당(1838.1.5~1922.1.20)

프랑스의 수학자. 리옹 출생.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한 후 모교를 거쳐 1883년 이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든 후부터 서서히 진보해온 군론(群論)을 수학의 넓은 분야에 전개, 진일보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유한차원(有限次元)의 선형군(線型群)의 수에 관한 ‘조르당의 정리(定理)’는 고차원의 정다면체론과 결부되어 고차원공간(高次元空間) 안에서의 이산유한군(離散有限群)의 고찰로 발전하였으며, 또한 대수함수를 해답으로 가지는 선형 미분방정식의 이론과 리만면(面)의 이론에 도입되었다. 저서 《치환론(置換論)과 대수방정식론(代數方程式論)》(1870)은 유한군론을 수론(數論)·함수론·대수기하학에 응용한 성과의 집대성으로서 알려졌으며, 《해석학교정(解析學敎程)》(3권, 82∼87)은 19세기 후반 당시 프랑스의 종합적 교과서의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F.클라인과 M.S.리 등을 지도하였다.

 

주세걸(朱世傑/?~?)

중국 원(元)나라 초기의 수학자. 옌산[燕山] 출생. 중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수학을 배우고 마침내 수학자로서 이름을 떨치자, 각지에서 제자들이 운집하였다. 저서에 《산학계몽(算學啓蒙)》(3권,1299) 《사원옥감(四元玉鑑)》(3권,1303)이 있다. 《산학계몽》은 당시의 최첨단을 걷는 교과서로서 일원방정식의 해법인 천원술(天元術)이 소개되어 있으며 급수구화법(級數求和法)에 대한 계산예(計算例)도 많이 싣고 있다. 《사원보감》은 《산학계몽》을 발전시킨 저서로, 사원술(四元術)이란 천원(天元)·지원(地元)·인원(人元)·물원(物元)의 4원방정식의 해법이며, 보간법(補間法)인 초차술(招差術)의 계산예도 포함되어 있다.

 

진구소(秦九韶/?~?)

중국 남송(南宋) 때의 수학자. 자 도고(道古). 쓰촨성[四川省]출생.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당시의 수도 임안(臨安:浙江省 杭州)에 올라가 태사(太史)에게서 역법(曆法)을 공부하는 한편 어느 은사(隱士)로부터 수학을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년시절에는 촉(蜀)나라로 진공해 온 원군(元軍)과 10년간 싸운 사실도 있었다. 그 후 역학에 관한 지식이 인정되어 중앙의 부름을 받고 임안으로 올라가 1244년에는 통직랑통판건강부(通直郞通判建康府)가 되었고, 47년 《수학구장(數學九章)》을 저작하였다. 55년경에는 연강제치사참의관(沿江制置司參議官)에 올랐으나, 당시의 재상 오잠(吳潛)과 가까웠기 때문에 60년 오잠이 실각하자 이에 연루되어 광둥[廣東]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채프먼(1888.1.29~1970.6.16)

영국의 지구물리학자·수학자. 맨체스터·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배웠고, 그리니치 관측소원(1910~14), 케임브리지 대학의 직원을 거쳐(13~19), 맨체스터대학 수학 교수(19~24), 그 후 런던의 임피리얼 칼리지의 주임교수, 옥스퍼드대학 물리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또한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연구원을 거쳐, 1951년 이후 알래스카대학 지구물리학 교수를 지냈고, 국제지구관측년의 국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수학에서는 발산급수(發散級數)의 연구가 있으나, 물리학 연구로 전향하여 기체의 운동학적 이론을 전개, ‘마르코프 과정’의 전이확률(轉移確率)에 관한 채프먼 방정식을 성립시켜 지구자기(地球磁氣)·전리층·기상학·기상광학 등의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올렸다. 《불균일 기체의 수학적 이론》(Cowling과 共著) 《지구자기학》은 명저로서 널리 애독되고 있다.

 

처치(1903)

미국의 수학자·논리학자. 워싱턴 출생. 프린스턴대학 졸업 후, 1927∼29년 국비 특별연구원으로 하버드대학과 괴팅겐대학 및 암스테르담대학에서 연구하였고, 29∼67년 프린스턴대학 수학 및 논리학의 조교수·부교수·교수를 역임하였다. 36년부터는 《The Journal of Symbolic Logic》을 편집하였고, 67년부터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대학 논리학 및 수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계산이 가능한 함수를 귀납적 함수로 정의할 것을 제창하는 등, 수학기초론과 기호논리학에 많은 업적이 있다. 주요저서로 《The Calculi of Lambda-Conversion》(41)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Logic》(제1권, 56) 등이 있다.

 

체르멜로(1871.7.27~1953.5.21)

독일의 수학자·물리학자. 베를린 출생. 1910년 취리히대학 교수, 26년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수가 되었다. 수학 분야에서는 집합론·기초론을 연구하였으며, ‘체르멜로의 선택 공리’(1904)가 있다. 또한 통계역학도 연구하여, J.W.기브스의 통계역학을 번역하고 소개하였으나, L.볼츠만의 H정리에 관해서는, 이른바 ‘재귀성(再歸性)의 반론’을 제출하여 이를 비판하고 논쟁하였다. 이것은 J.H.푸앵카레의 정리를 기초로 하여 역학적인 가역성(可逆性)을 근거로 H정리의 비가역성의 모순을 지적한 것으로서, 통계 역학의 확률적 의미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비가역성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체비쇼프(1821.5.16~1894.12.8)

러시아의 수학자. 보로프스크 출생. 모스크바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미 학생시절에도 발표회에서 상을 타는 등 일찍부터 재능을 나타냈으며, 졸업 후에도 모스크바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184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가서 브니아코프스키에게 배우고, L.오일러의 수론(數論)을 연구하였으며, 또 《활동론》(1849)을 저술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교수가 되어, 연구를 계속하면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페테르부르크학파를 형성하였다. 80여 편의 논문은 수론·확률론·함수근사론(函數近似論) 그리고 다항식의 일반론과 적분론에까지 이른다. 그 중에서도 수론에서의 함수 π(x)의 평가와 디오판토스방정식의 해답의 연구, 확률론에서의 ‘큰수의 법칙’과 중심 극한정리(中心極限定理)의 연구, 특히 해석적(解析的) 방법의 확립 등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함수근사론에서 보여 준 구성적 함수론으로의 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최윤식(崔允植/1899~1959)

수학자. 호 동림(東林). 평북 선천(宣川) 출생.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 18년 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22년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 제1부, 26년 도쿄[東京]대학 이학부 수학과를 나와, 귀국 후 휘문고등보통학교·전주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32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조교수, 36년에는 교수를 역임했으며, 40년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로서 연희전문 등의 강사를 겸임했으며 45년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46년 서울대학 교수가 되었고 대한수물학회(大韓數物學會) 회장에 선임, 4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이 되었다가 49년 사임했다. 54년 대한수학회회장, 학술원 추천회원이 되었으며 55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수학을 연구하고 귀국, 56년 서울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문교부고시위원 등을 지냈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수학자로, 수학계의 수준향상을 위해 공헌했다. 저서에 《고등대수학》 《입체해석기하학》 《미분방정식해법론(微分方程式解法論)》이 있다.

 

카라테오도리(1873.9.13~1950.2.2)

독일의 수학자·수리물리학자(數理物理學者). 베를린 출생. 하노버·브레슬라우·괴팅겐·베를린·스미르나(그리스)대학 등을 거쳐 뮌헨대학 교수가 되었다. 특히 스미르나대학에서는 그 창립에 공헌이 컸다. 해석함수론(解析函數論) 및 실변수함수론(實變數函數論)을 연구하였으며, 변분법(變分法)에도 업적을 남겼다. 열역학(熱力學)에서는 엄밀한 수학적 취급을 시도한 끝에 그 공리론화(公理論化)를 달성, 이른바 ‘카라테오도리의 이론’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도 특수상대론(特殊相對論)에 관한 연구가 있다.

 

카르다노(1501.9.24~1576.9.21)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의 수학자·의사·자연철학자. 파비아 출생. 파비아 및 파도바대학을 마치고 밀라노대학·파비아대학·볼로냐대학에서 수학·의학을 강의하였다. 한때는 파비아 시장(市長)으로도 있었다. 점성술자(占星術者)로서 철학을 연구하였고, 도박군인 반면 대수학자(代數學者)였으며, 실험에 특기를 가진 물리학자인 동시에 전혀 신용할 수 없는 거짓말장이로 일컬어졌다. 또한, 산적(山賊)의 딸을 아내로 삼는 등 이상성격의 소유자로, 미치광이 천재라고 불렸다. 의사로서는 스코틀랜드의 어떤 추기경의 천식을 치료하는 데 침대에 깃털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알레르기 현상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학자로서는 당시의 제1인자였으며, 1545년 대수학의 저서 《아르스 마그나:Ars magna seu de regulis algebrae》를 출간하였는데, 그중 3차방정식의 대수적인 해법은 타르탈리아(본명 폰타나:1499∼57)가 발견한 것인데도 마치 자기가 고안(考案)한 것처럼 무단 발표함으로써, 영구히 인격적 손상을 입게 되었다. 자연인식의 문제에 대해서는 피타고라스, 플라톤과 같은 물활론적(物活論的)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범신론적·반가톨릭적이라 하여, 70년 이단(異端)으로 몰려 6개월간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연금(年金)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카발리에리(1598~1647.11.30)

이탈리아의 수학자. 밀라노 출생. 불가분량(不可分量)의 기하학을 전개해서 적분법의 선구를 이루었다. G.갈릴레이의 제자로서 귀족 출신이었으나 예수회 수도사가 된 뒤 수도원에서의 임무가 그의 학문적 활동을 마침내 수학으로 이끌게 되었다고 한다. 갈릴레이의 추천으로 1629년 볼로냐대학의 수학교수가 되어 천문학·계산기술·원뿔곡선·삼각법 등에 이어 일련의 저술을 하였으며, 32년 11자리의 삼각함수 로그표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수학사에 남긴 보다 큰 공적은 《연속체(連續體)를 불가분량을 사용한 새로운 방법에 의해 설명한 기하학》(1621∼35)이라는 저술에 정리한 불가분량의 방법의 창시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정적분의 개념 도입이었다. 그 후 E.토리첼리 등의 지지를 받았으며, 파스칼에 의해 발전되어 근대 미적분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칸토어(1829~1920)

독일의 수학사가(數學史家). 만하임 출생. 1877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다. 저서 《수학사(數學史):Vorlesungen 웑er Geschichte der Mathematik》(1880∼1908)는 그가 친필로 쓰고 감수(監修)한 고대에서 18세기까지의 제1~3권과 9인의 수학사가가 집필한 제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수학사의 저서로 알려졌다. 이 밖에 《수학사론집(數學史論集):Abhandlungen zur Geschichte der Mathematik》(1877∼1912)을 편집·창간하였다.

 

칸토어(1845~1918)

독일의 수학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집합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유대계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서 1850년 아버지와 함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한 후로는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취리히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괴팅겐대학에서도 한 학기를 보냈다. 베를린에서는 E.E.쿠머, K.바이에르슈트라스, L.크로네커 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가우스의 정수론(整數論)에 심취하였다. 69년 할레대학 강사와 조교수를 거쳐 79년 정교수가 되었으나, 그 사이에 전개한 혁명적인 무한집합(無限集合)에 관한 연구는, 당시의 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크로네커를 대표로 하는 일부 사람들의 비난·공격은 치열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84년부터 정신장애를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여생을 마쳤다. 칸토어의 중요한 연구는 72년의 삼각함수의 급수 연구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으로부터 해석학의 기본적 문제로 향하고, 근방(近傍)·집적점(集積點)·도집합(導集合) 같은 개념을 확립하여 실변수 함수론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한편 대수적 수의 집합 문제를 논하고, 무한집합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분석하여 고전집합론을 창시하고, 이의 본질적 부분을 완성하였다. 유명한 저서로 《초한적(超限的) 집합론의 기초에 대한 기여:Beitr둮e zur Begr웢dung der trnsfiniten Mengenlehre》(1895∼97)가 있다.

 

코발레프스카야(1850~1891)

러시아의 수학자. 모스크바 출생. 편미분방정식론·함수론(函數論) 등을 역학에 응용하는 주요업적을 남겼다. 퇴역 육군 중장의 딸이었으며 뛰어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고 수학에 뜻을 두었으나,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여성의 대학 진학이 인정되지 않았고, 독신자의 국외유학도 허가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V.O.코발레프스키와 형식적인 결혼을 하여, 베를린대학에서 바이에르슈트라스에게 수학을 배우고, 1874년 괴팅겐대학에서 편미분방정식론, 제3종 아벨적분, 토성의 고리 모양 등에 관한 세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남편과 실제로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사업실패로 자살하였다. 그 후 1884년 스톡홀름대학의 초청을 받아 교수로 갔으며, 그 곳에서는 고정점(固定點)을 둘러싼 강체(剛體)의 회전에 관한 논문으로, 88년 파리과학 아카데미로부터 수상하였다. 자서전적 소설 《라에프스키가(家)의 자매》 등의 문학작품도 남겼다.

 

코시(1789~1857)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출생. 높은 교양을 지닌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고 16세 때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에 토목기사가 되어 셰르부르의 축항 공사에 종사하면서 수학을 연구하였다. 1815년 수학상의 업적이 인정되어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가 되었고, 이듬해에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며, 정치적으로는 발자크와 같은 정통 왕당파(王黨派)였으며, 왕당원으로서의 지조를 지켜 나갔다. 왕당파로서의 지조 때문에 30년의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 내에서는 일체의 공직 취임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피신하였으며, 여기서 그를 위해 창설된 새로운 강좌를 맡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 후 5년간을 프라하에서 지내다가 38년 파리로 돌아왔다. 48년 나폴레옹 3세가 즉위한 뒤에야 공직에의 취임이 허용되어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어 평생 이 교수직에 있었다. 주요업적으로 복소변수함수론(複素變數函數論)과 해석학에서의 엄밀성을 주장한 것을 들 수 있다. 18세기에 발견된 미적분학(微積分學)은 달랑베르 시대로부터 코시와 같은 시대 사람인 가우스, 아벨, 볼차노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엄밀성의 시대로 바뀌고 있었다. 이것의 대표적 예를, 적분의 존재를 증명한 ‘존재증명’에서 볼 수 있다. 복소변수함수론은 코시에 의해 유체역학과 공기역학에서의 유용한 도구로부터 수학연구의 독립된 분야가 되었다. 1814년 이후로는 끊임없이 함수론에 관하여 논문을 썼으며, 25년 유수(留數)를 지니고 있는 코시의 적분정리를 발표하였다. 파리의 과학아카데미가 학회지 《Comptes Rendus》에 보내오는 그의 논문의 길이를 제한해야 할 정도로 그의 연구는 다방면에 걸쳐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그의 연구에서, 빛의 이론과 역학에 대한 공헌도 있으며, 탄성(彈性)의 수학적 이론을 L.M.H.나비에와 함께 기초작업을 이루어 놓은 점 또한 중요한 것이다. 《해석학 교정》에서는 현재 교과서에서 쓰이고 있는 미적분의 기초를 남겼으며, 38년에는 미분방정식의 풀이에 관하여 최초의 존재증명을 하였다. 이 밖에 그의 모든 연구는 《?vres compl뢶es d’Augustin Cauchy》(27권, 1882∼1901)에 수록되어 있다.

 

콜모고로프(1903~1987)

소련의 수학자. 탐보프 출생. 1925년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하고 31∼59년 모교의 교수로 있었다. 후에 이 대학의 수학역학 연구소장에 취임하였고, 39년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확률과정의 연구에 의해 40년 스탈린상을 수상하였다. 모스크바 수학회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던 N.N.루진에게 배워 그 영향을 받았고, 모스크바수학회의 전통을 계승하여 확률론 개척에 노력하였다. 확률의 수학적 연구는 이미 시작된 뒤였으나, 20세기 초에 그 참다운 뜻이 모스크바학파와 파리의 E.보렐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었다. 그들은 복권의 화살이 표적의 어떤 범위의 어디에 맞는가의 확률을 정확히 고찰하기 위해서는, ‘범위’와 ‘어디냐’를 명백히 하여야 한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적분학에서도 어느 범위에서 적분해야 하는지, 그 범위를 밝혀내는 것이 문제였다. 이와 같이 확률과 적분학은 범위를 확실하게 하는 것, 즉 ‘어떤 집합을 대상으로 하느냐’의 공통된 문제에 귀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 콜모고로프는 르베그적분을 바탕으로 확률론을 공리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확률론에 대한 공헌 이외에도 푸리에급수론·위상수학(位相數學) 분야, 또한 그 응용면에서도 크게 공헌했다. 주요저서로 《확률론의 기초개념:Grundbegriffe der Wahrscheinlichkeitsrechnung》(36) 등이 있다.

 

쿠란트(1888.1.8~1972.1.27)

독일 출신 미국의 수학자. 괴팅겐대학 교수(1920∼34)로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활약하였고, 미국에 귀화하였다. 미국에서는 뉴욕대학 교수로 수학·역학연구소장을 지냈으며, 해석학(解析學)·수론(數論)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D.힐베르트와 공동으로 저술한 《수리물리학의 방법》은 유명한 저술로서 물리 학자들 사이에 널리 읽혀지고 있다.

 

쿠르노(1801.8.28~1877.3.31)

프랑스의 수학자·철학자·경제학자. 소르본대학 등에서 수학을 배우고 리옹대학에 초빙되어 수학 교수가 되었다. 저작은 경제학·수학·철학 등 각 분야에 걸쳐 있으며, 특히 《부(富) 이론의 수학적 원리에 관한 연구:Recherches sur les principes math럐atiques de la th럒rie des richesses》(1838)는 유명하다. 이것에 의하여 수요의 법칙이나 독점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독점가격(쿠르노의 점)의 원리를 밝힘으로써 근대 수리경제학(數理經濟學)의 시조로 불리게 되었다. 또 확률론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과학 및 역사에서의 기본적 관념의 연쇄에 대하여》(61) 《근세의 사상과 사건의 진행에 관한 고찰》(72) 《유물론, 생기론(生氣論), 합리론》(75) 《경제학설 개관》(77) 등을 저작하였다.

 

쿠머(1810.1.29~1893.5.14)

독일의 수학자. 폴란드의 조라우 출생.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빈곤 속에서 자랐다. 1828년 할레대학 신학부에 들어갔으나, 셰르크의 영향으로 수학으로 바꾸었다. 31년 대학을 졸업, 조라우의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어 리그니츠의 중학교로 옮겼는데, 여기서 L.크로네커를 가르쳤다. 42년 브레슬라우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55년 P.G.디리클레의 후임으로 베를린대학 교수, 베를린학사원(學士院) 회원이 되었다. 연구분야는 해석학·기하학·대수학·정수론(整數論) 및 응용수학 등 광범위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수론에서의 P.페르마의 문제에 관한 연구가 중요하며, 이 연구에서 ‘이상수(理想數:ideale Zahl)’를 도입하였다. 페르마의 문제는 부분적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하였는데, 파리의 과학학사원(科學學士院)은 이 ‘이상수’를 높이 평가하여, 57년 아카데미상을 수여하였다. 이 이상수 개념은 후세의 수학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크레모나(1830.12.7~1903.6.10)

이탈리아의 수학자. 롬바르디아주 파비아 출생. 1860년 볼로냐대학 교수, 66년 밀라노대학 교수를 거쳐 73년 로마대학 교수가 되었다.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의 연습문제 중에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을 더하여 이탈리아 기하학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이탈리아가 기하학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그의 공헌에 의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의 M.샤를(1793∼1880)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하학을 지망한 듯 하며, 63~65년에 걸쳐 연구한 쌍유리변환(雙有理變換)은 곡선의 중복점 환원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서 기하학 등의 연구에 불가결의 요소가 되었다.

 

크렐레(1780.3.11~1855.10.6)

독일의 수학자·공학자. 브란덴부르크 출생. 기술전문 학자로서 건설관계 관리(官吏)로서의 지위와 정치력을 이용하여 순수수학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828년 독일의 문화문제를 담당하는 내각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며, 잇달아 베를린 학사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프로이센 대로(大路) 건설에 이바지하였으며, 독일 최초의 철도부설을 계획하여 실현하였다. 이 밖에 철도관계의 많은 일에 공헌하였으며, 26년 《순수·응용 수학 잡지:Journal f웦 die reine und angewandte Mathematik》 《크렐레지:Crelle’s Journal》를 창간하였다.

 

크로네커(1823.12.7~1891.12.29)

독일의 수학자. 슐레지엔 리그니츠 출생. 베를린대학에서 브레슬라우대학으로 이적하여 E.E.쿠머의 지도를 받아, 대수체(代數體)의 단위원(單位元)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1849). 1857년 ‘크로네커의 청춘의 꿈’이라는 부제(副題)를 붙인 논문에서, 허2차체상(虛二次體上)의 아벨체(Abel體)가 허수곱셈법[虛數乘法]에 의하여 행해짐을 예상하여, 수학계에 과제를 제시하여 주목을 받았다. 원외(員外) 교수로 베를린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만년 쿠머의 뒤를 이어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83). 주요연구는 타원함수, 이데알론(論), 2차 형식론(形式論) 등인데, 이들 연구는 항상 정수론(整數論)과 관련되어 있으며, “정수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며, 그 밖의 모든 수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수학의 산술화(算術化)가 신념이요 염원이었다. 이 때문에 동시대에 오늘날의 수론(數論)의 기초를 만든 K.바이어슈트라스 등과 자주 논쟁하였으며, 또 연속체(連續體)를 점집합(點集合)에서 논하려고 한 G.칸토어(1845∼1918)와 대적한 일은 유명하다.

 

클라인(1849.11.25~1925.6.22)

독일의 수학자. 뒤셀도르프 출생. 본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베를린에서 M.S.리와 함께 수학을 연구하고, 함께 파리에 유학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 귀국했으며, 괴팅겐대학 강사(1871), 에를랑겐대학 교수(72), 뮌헨공업대학 교수(75), 라이프치히대학 교수(80), 괴팅겐대학 교수(86)를 역임하였다. 기하학·방정식론·함수론·역학 등의 분야에서 다채로운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유명한 것은, 군론(群論)의 입장에서 기하학을 분류하고 기하학에 새로운 장을 열었던 이른바 ‘에를랑겐목록(Erlangen Programm)’과, 복소변수함수론의 한 첨단이 되는 ‘오토모르프함수(一次變換으로 값이 달라지지 않는 解析函數)’의 연구이며, 이는 푸앵카레와의 논쟁 속에서 진행되었다. 수학에 대한 클라인의 태도는 융합적·직관적이었으며, 물리학적인 사고방식을 추상적인 수학에도 활용하였다. 한편, 대학에서부터 중등학교에 이르는 수학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국제수학조사회(國際數學調査會)의 중앙위원이 되었고(1908), 종합통일의 재능과 열의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는 수학사에 관한 것이 있다. 괴팅겐은 클라인의 힘으로 세계 수학의 중심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클레로(1713~1765)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선천적으로 수학에 재능을 보였는데, 13세 때 파리 아카데미에 수학 논문을 제출하였다. 18세 때 《공간곡선(空間曲線)의 곡률(曲率)에 관한 연구:Recherches sur les courbes ?double courbure》를 써서 해석적 곡선론의 선구를 이루었고, 이에 의하여 그 해 학사원(學士院) 회원이 되었다(1731). 1736년 프랑스 정부는 지구가 구형(球形)에서 어느 정도 어긋나 있는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랍란드에 원정대를 파견하였는데, 클레로는 이때 모페르튀와 동행하였다. 그 결과 측정값의 해석을 계기로 지구의 유체역학적 고찰(流體力學的考察)을 하고, 《지구형상론(地球形狀論):Theorie de la figure de la terre》(43)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지구의 형상에 대한 중요한 연구로서, 유체의 평형과 회전타원체의 인력의 문제를 획기적으로 다루었으며, ‘클레로의 정리’도 여기에 들어 있다. 52년 《달의 이론:Theorie de la lune》을 발표하여 페테르스부르크 학사원상(學士院賞)을 받았는데, 이것은 달의 운동에 대한 해석학의 최초의 적용이며, 삼체문제(三體問題)도 구명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연구는 주로 천체역학·측지학에 관한 것이었지만, 한편 수학 자체에 대한 공헌도 커서, 선적분(線積分)·미분방정식의 연구(클레로의 방정식)와 퍼텐셜론(論)에의 선구적 업적이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대수학·기하학의 교과서도 저술하여 프랑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타르스키(1902.1.14~1983.10.26)

폴란드 출생의 미국 수학자·논리학자. 바르샤바대학에서 레스니에프스키, J.루카셰비치에게 배웠다. 폴란드 학파(學派)의 일원으로서 1935년 《형식언어(形式言語)에서의 진리개념(眞理槪念):Der Wahrheitsbegriff in den formalisierten Sprachen》을 발표하여 인정을 받았다. 42∼68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학 강사·부교수·교수를 역임하고, 68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주요저서는 《수학적 논리학 서설》 《논리학 및 연역과학(演繹科學) 방법론 서설》 《논리학·의미론·대수론(代數論):Logic, Semantics, Metamathematics》(56) 등이다.

 

탈레스(BC 624?~BC 546?)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7현인(七賢人)의 제1인자이며, 밀레토스학파의 시조이다.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 밀레토스 출생. 페니키아인의 혈통이며, 당초에는 상인으로 재산을 모아 이집트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BC 585년 5월 28일의 일식(日蝕)을 예언하였는데, 그것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적 지식에 의했던 듯하다. 그는 이집트의 경험적·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최초의 기하학을 확립하였다. ‘원(圓)은 지름에 의해서 2등분된다’, ‘2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두 직선이 교차할 때 그 맞꼭지각의 크기는 같다’ 등의 정리(定理)는 그가 발견한 것이다. 또, 닮은꼴을 이용하여 해안에서 해상에 있는 배[船]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고, 자석(磁石)이 금속을 끌어당기는 작용도 그의 발견으로 전한다. 또한 만물의 근원을 추구한 철학의 창시자이며 그 근원은 ‘물’이라고 하였다(형이상학). 물은 생명을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며, 또 물이 고체·액체·기체라는 3가지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에서 그렇게 추정한 듯하다(물활론). 변화하는 만물에 일관하는 본질적인 것을 문제로 한 점에 그의 불후의 공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대지(大地)는 둥근 편평상(扁平狀)이며 물 위에 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테일러(1685~1731)

영국의 수학자. 미들섹스주(州) 에드먼턴 출생.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712년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14∼18년에는 간사(幹事)의 일을 맡아보았다. 미분학에서 유명한 ‘테일러의 정리(이것을 급수로 전개한 것이 테일러 급수이다)’를 저서 《증분법(增分法):Methodus Incrementorum directa et inversa》(15)에서 밝혔는데, 테일러의 도출(導出)로는 급수의 수렴성(收斂性)에 관한 고찰이 불충분하였다. 그 후, C.매클로린이 무한급수의 고찰로 이것을 재정식화하여 그 저서에 기술함으로써(1742), 흔히 ‘매클로린의 정리(또는 급수)’로도 불린다. 그 진정한 의의는 L.오일러가 《미분학(微分學)》(55)에 응용하여 알려지게 되었으며, 또 J.L.라그랑주가 이에 잉여항(剩餘項)을 추가하고 A.코시가 다시 증명하였다.

 

파스칼(1623.6.19~1662.8.19)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종교사상가.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페랑 출생. 3세 때 어머니와 사별하고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왔다. 학교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으로 유클리드 기하학(幾何學)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16세에 《원뿔곡선 시론(試論)》을 발표하여 당시의 수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정리》는 이 시론에 포함되어 있다. 1604년 아버지와 함께 루앙으로 옮겨, 세무장관이던 아버지가 하는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계산기를 고안, 시작(試作)하였다. 루앙에 있을 때 얀센주의의 신앙혁신운동(信仰革新運動)에 접하여 최초의 회심을 경험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토리첼리의 실험을 행한 이래, 진공(眞空)에 관한 문제, 유체정역학(流體靜力學)에 관한 문제에 흥미를 가졌고, 마침내 《진공에 관한 신실험(新實驗)》을 발표하였다. 47년 질병의 진단을 받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 그 무렵 귀국 중에 있던 R.데카르트의 방문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처남 페리에에게 부탁한 퓌드돔 산정(山頂)의 실험에 의해 대기의 압력을 확인하였다. 5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여동생 자클린이 포르 루아얄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과는 달리, 파스칼은 로아네스공(公), 슈발리에 드 메레 등과 친교를 맺고 사교계에 뛰어들어 인생의 기쁨을 추구하였다. 노름에서 딴 돈을 공정하게 분배해주는 문제에서 확률론을 창안하여, 《수삼각형론(數三角形論)》 및 그 《부대논문(附帶論文)》을 썼다. 파스칼은 이 논문으로 수학적 귀납법의 훌륭한 전형(典型)을 구성하였으며, 수의 순열·조합·확률과 이항식(二項式)에 대한 수삼각형의 응용을 설명하였다. 또 물리실험의 결과를 《유체의 평형》 《대기의 무게》라는 두 논문으로 정리하였다. 초등 물리학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원리’는 《유체의 평형》 속에 포함되어 있다. 54년 여름부터 사교계에 대한 혐오감이 점점 싹텄고, 11월 23일 깊은 밤, 결정적인 회심의 환희를 체험하고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객원(客員)이 되었다. 이 점은 수녀인 여동생 자클린에게서 입은 감화가 컸다고 한다. 《죄인의 회심에 대하여》 《초기의 그리스도 신자와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의 비교》 《요약(要約) 예수 그리스도전》 등의 소품은 바로 그 무렵의 저작이다. 또 포르 루아얄 데샹에서는 《드 사시씨(氏)와의 대화》를 남겼다.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수회와 포르 루아얄에 모인 얀센파 사이에 신학상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파스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논쟁에 말려들었다. 그는 《시골 친구에게 부치는 편지(프로뱅시알)》라는 제목의 서한체(書翰體)의 글을 익명으로 속속 간행하여 예수회 신학의 기만을 폭로하는 한편, 그 오만불손한 윤리를 공격하였다. 56년 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8편의 서한문을 발표하였다. 파스칼은 이 서한문에서 구사한 경쾌하고 솔직한 표현에 의해 프랑스어에 새로운 문체(文體)를 도입한 결과가 되었다. 58년 우연한 동기에서 사이클로이드 문제를 해결하고 적분법(積分法)을 창안해 냈다. 《사이클로이드의 역사》 《삼선형론(三線形論)》 《사분원(四分圓)의 사인론[正弦論]》 《원호론(圓弧論)》 《사이클로이드 일반론》 등 일련의 수학논문 속에 그 이론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도 《기하학적 정신에 대하여》 《설득술(說得術)에 대하여》 《질병의 선용(善用)을 신에게 비는 기도》 등의 소품을 쓴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변증론(辨證論)》을 집필하기 위하여, 단편적(斷片的)인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병고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한 채, 39세로 생애를 마쳤다. 사망 후 그의 근친과 포르 루아얄의 친우들이 그 초고를 정리·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팡세:Pensees》의 초판본(1670)이다.

 

파치올리(1445?~1510?)

이탈리아의 수학자. Luca di Borgo라고도 한다. 토스카나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로서, 페루자·나폴리·밀라노·피렌체·로마·베네치아 등 각지에서 수학을 교수하였으며, 1494년 《산술집성(算術集成):Sa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cioni e proporcionalit닡렝?저술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산술·대수(代數)·삼각법(三角法)에 관한 모든 지식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피보나치의 《주판서(珠板書)》 이래 가장 광범위한 수학서로 일컬어진다. 특히 이 저서에서 처음으로 복식부기가 기술(記述)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교우관계가 있었다.

 

페르마(1601~1665)

프랑스의 수학자. 툴루즈 근처 보몬 드 로마냐 출생. 수학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수학자였으나 여러 방면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으므로,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1631년부터 법률가로서 툴루즈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으며, 이어 48년부터는 툴루즈 지방의회의 칙선의원(勅選議員)이 되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직에 종사하였다. 데카르트, 메르센 등과 서간을 통하여 연구 성과를 통보하였으며 생전에는 그 연구 내용을 공간(公刊)하지 않았다. 또 이 서간은 결론으로서 얻어진 정리(定理)만을 표시하고, 증명방법을 풀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의 수학자에게 많은 과제를 남기게 되어 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연구 성과 가운데 우선 미적분(微積分)에 관한 업적을 들 수 있다. 연속곡선(連續曲線)에 접선(接線)을 긋는 방법으로서 제기된 이 문제는 페르마를 ‘극값[極値]의 문제’로 유도하여 미분의 개념에 도달시킨 것이며, 미적분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에 이런 성과가 얻어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 이것과 관련하여 극대극소(極大極小)의 문제를 연구하고, 이를 광학(光學)에 응용하여 ‘최단 시간의 원리(페르마의 원리)’를 발견했다. 또 빛의 반사·굴절의 법칙을 유도해냈고, 후년의 역학 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기하학 분야에서는 데카르트와는 별도로 해석기하학을 수립하여 3차원 공간을 취급하였다(데카르트는 2차원). 파스칼과의 서간에서는 확률을 논하여, 오늘날 파스칼과 함께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창시자로 인정된다. 연구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수론(整數論) 분야이다. 디오판토스의 수론서(數論書)에 자극되어 관여하게 된 이 분야에서는 소수수열(素數數列:페르마형 소수)의 추측에서 시작하여, 페르마의 대정리(np-n의 정리), 4n+1형 소수에 관한 제곱수[平方數]의 합의 정리, n=2의 디오판토스방정식의 해답의 정리 등에서 이른바 ‘최후의 정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통찰력이 발휘되어 정수론 연구사상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사실 페르마가 발견하고 스스로 증명했다고 하는 정리의 증명에 후년의 수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최후의 정리’는 오늘날까지도 미해결인 채 과제로 남아 있다.

 

페아노(1858~1932)

이탈리아의 수학자·논리학자. 직관(直觀)에 얽매이지 않고 기하학을 건설하겠다는 기하학의 공리화(公理化)를 시도하여, 정의(定義)·공리·미정의어(未定義語)의 선택과 채용을 확립하여 일종의 수학적 논리학을 의도, 후에 드디어 D.힐베르트의 《기하학의 기초:Grundlagen der Geometrie》(1899)로 결실을 맺었다. 1889년의 결합의 공리와 순서의 공리에 관한 연구는 유명하며, 90년 토리노대학 교수가 되었다. 저서 《수학공식안(數學公式案):Formulario Mathematico》(5권, 1895∼1905)는 ‘페아노의 기호’로 쓰여졌으며, ‘페아노의 공리’가 서술되어 있다. 기호논리학의 개척자로도 꼽힌다. 이 밖에 코시 문제의 해(解)와 조르당곡선에 관한 연구 등 불변식론·미분방정식론에도 공헌하였다. 일종의 국제어인 ‘굴절 없는 라틴어(Latino sine flexione)’를 창안하기도 하였다(1903).

 

폰트랴긴(1908.9.3~1988.5.3)

소련의 수학자. 장님이었으나 24세 때에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되었고, 31세 때에 과학아카데미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수적(代數的) 위상공간론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1930년대부터 상대정리(相對定理)의 대수적 정식화에 착수하여 코호모토피 연산자(演算子)를 발견하였고, 코호모토피적인 구면군(球面群)의 계산을 행하여 리군(群)과 그라스만 다양체(多樣體)의 이론을 전개하고 특성 클라스(폰트랴긴類)를 발견하였다. 이와 같은 위상공간 아벨군(群)의 특성 이론의 건설은, 대수뿐만 아니라 일련의 다른 수학부문에 영향을 끼쳤으며, 위상대수 및 리군의 영역 연구는 많은 수학자에게 계승되고 있다. 또 비선형진동론(非線型振動論)에서는 A.A.안드로노프와 함께 ‘조계(粗系)’를 도입하여 미소(微小)파라미터를 가지는 미분방정식론에 중요한 성과를 얻어 공학적 대상의 제어(制御) 문제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푸리에(1768.3.21~1830.5.16)

프랑스의 수학자·수리과학자. 오제르 출생. 8세 때에 고아가 되어, 베네딕투스파(派)의 성직자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는데, 군인이 되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신분상의 장애 때문에 군인이 되는 길을 단념하고 성직에 뜻을 두었으나, 1789년 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뜻을 바꾸어 94년 나폴레옹 집권하에 설립된 사범학교 교사가 되었고, 이어 고등이공학교에서 수학을 강의하였다. 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에 수행하였다가 나폴레옹이 귀국한 후에도 카이로에 체류하여 행정관으로서의 공적을 인정받았다. 1801년 귀국한 후 이제르현(縣)의 지사로 임명되었고, 그르노블에서 살았다. 그 곳에서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열전도론(熱傳導論)을 연구하여 1807년 ‘열의 해석적 이론’을 제출하였고, 12년 프랑스 학사원의 대상(大賞)을 획득하였다. 22년 완성된 이 이론에는 ‘푸리에의 정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푸리에급수’의 전개에 따라서 그 후의 수리물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6년 프랑스 학사원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또 실계수방정식의 해법에 관한 연구로도 알려져 있다.

 

푸아송(1781.6.21~1840.4.25)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J.라그랑주, P.라플라스에게 배웠으며, 1802년 J.B.푸리에의 후임으로서 모교 교수가 되었으며, 1809년 소르본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수학·응용수학의 넓은 분야에 걸쳐 업적이 있으며, 정적분·미분방정식론을 연구하여, 13년 퍼텐셜 개념을 도입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푸아송방정식’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밖에 변분법(變分法)·푸리에급수·확률론의 연구, 물리학에 대한 응용면에서의 열학(熱學)·모세관 현상·전자기장론(電磁氣場論)·인력론(引力論) 등의 연구가 있으며, 탄성(彈性) 실험에서는 ‘푸아송비(比)’를 도입하였다. 프랑세즈 아카데미 회원이었으며, 후에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프레게(1848.11.8~1925.7.26)

독일의 논리학자·수학자·철학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출생. 명제논리(命題論理)와 술어논리(述語論理)를 공리체계(公理體系)로 해서 조직화하여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에의 길을 열었고, 1879∼1918년 예나대학 교수를 지냈다. 논리학을 기초로 하여 수학의 구성·도출을 시도, 논리주의를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그는 또한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외연(外延)과 내포(內包)의 구별을 명제로까지 확장, 전자를 명제의 진리치(眞理値), 후자를 그 의미라고 생각하고, 또한 표현에 대하여는 문장적인 규칙으로서 결정되는 그 의의와 대상과의 지시관계에서의 의미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후의 ‘언어의 계층의 구별’을 이미 확인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그 특이한 기호표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는데, J.러셀에 의해서 발견된 이래 현대논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저서에는 《산술의 기초》(1884) 《산술의 원리》(1893∼1903) 등이 있다.

 

프로베니우스(1849.10.26~1917.8.3)

독일의 수학자. 베를린 출생. 1874년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취리히 공업대학으로 옮겨 1902년까지 재직한 후, 다시 베를린대학으로 돌아왔다. 19세기 후반의 대수학(代數學)의 발전, 특히 그 추상화(抽象化)와 군론(群論)의 시기에 중요 추진자의 한 사람이 되어, 군(群)의 지표(指標)의 개념을 도입하여 유한군(有限群)의 표현론을 실질적으로 완성하였다. 대수적 정수론(代數的整數論)에서의 ‘프로베니우스 치환(置換)’의 중요한 지적을 하였으며, 또 L.푹스의 미분방정식의 이론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플뤼커(1801.6.16~1868.5.22)

독일의 수학자·물리학자. 앨버펠트 출생. 본대학·하이델베르크대학·베를린대학 등에서 공부하고, 파리로 가 프랑스 수학의 영향을 받았다. 본대학·베를린대학·할레대학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835년 《해석기하학의 체계》를 저술하였다. 슈타이너의 선속(線束)에 대응하는 일차함수를 도입하여 해석기하학에 가동적 요소를 첨가하고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과의 종합에 진력하였으며, 만년에는 대수기하학 개척에 공헌하였다. 47년 본대학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는데, 그 곳에 살고 있던 가이슬러가 제작한 방전관을 이용하여 진공방전(眞空放電:低壓氣體放電)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스펙트럼의 휘선(輝線)이 물질에 고유하다는 사실과 이에 의해 물질을 검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수소스펙트럼의 3개의 주선(主線)을 부여하였다. 그 후 J.W.히토르프와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온도변화에 의한 이종(異種) 스펙트럼의 발생을 확인하고 이를 수소와 질소에 대하여 실증하였다. 59년 방전관의 음극에 가까운 유리벽에서 형광의 발생을 발견하고, 그 원인이 음극에서 나오는 방사선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피보나치(1170?~1250?)

이탈리아의 수학자. 피사 출생. 피사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도 불린다. 아라비아에서 발달한 수학을 섭렵하여 이를 정리·소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여러 나라의 수학을 부흥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프리카 북안(北岸) 부지항(港)의 피사의 상무관장(商務館長)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수판(數板)에 의한 계산법을 배우고 또한 이슬람교 학교에서 인도 기수법(記數法)을 익혔다고 한다. 그 후 이집트·시리아·그리스·시칠리아 등지를 여행하여 갖가지 계산법을 습득한 다음 피사로 돌아와, 1202년 《주판서(珠板書)》를 저술하였다. 15장으로 된 이 책은 아라비아의 산술 및 대수(代數) 지식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의 수학서의 결정판으로서 그 후 수세기 동안 유럽 여러 나라에서의 수학원전(數學原典) 구실을 하였다. 기하학에 대한 저서 《기하학의 실용》(1220)에서는 유클리드를 소개하고 몇 가지 정리를 증명하기도 하였다.

 

피타고라스(BC582?~BC497?)

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 에게해(海)의 사모스섬[島] 출생.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크로톤에서 비밀교단을 결성하고, 그 후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당시의 밀의종교(密儀宗敎)의 형식에 따라 절제·질박(質朴)·심신의 단련을 목표로 하고, 신들과 양친·친구·계율에 대하여 절대적 신실(信實)과 자제·복종을 설파하였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윤회(輪廻)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육식을 금하였다. 이론적 방면의 연구에서는 음악과 수학을 중시하였는데, 음악에서는 일현금(一絃琴)에 의하여 음정이 수비례(數比例)를 이루는 현상을 발견하고 음악을 수학의 한 분과로 보았다.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인지 또는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의 구별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의 저술의 단편에 의하여 당시 피타고라스와 그 일파의 업적이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다. 그 수는 자연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수와 기하학에서의 점과를 대응시켰다. 예컨대 자연수 계열의 연속항의 임의의 항까지의 합은 삼각형수이고, 마찬가지로 기수계열의 합은 정사각형수, 우수계열의 합은 직사각형수라는 방법으로 정의하였다. 또 완전수, 인수의 합, 비례와 평균의 연구, 상가평균, 조화평균 등도 분류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그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는 불분명하며 그의 증명법도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오늘날의 그 정리의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다). 그런데 이의 정리에서 의외로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정사각형의 한 변과 그의 대각선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이 경우 대각선의 길이는, 한 변을 1이라 할 때 ?가 되어 약분이 불가능한 무리수가 된다. 이것은 자연수만을 수로 생각한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에 있어서는 극히 난문제였기 때문에 수로부터 제외시켰던 것이다. 또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180°)과 같음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플라톤의 다면체(多面體)’로 불리는 정사면체·정육면체·정팔면체·정십이면체·정이십면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십이면체는 정오각형의 작도를 필요로 하지만 한 선분을 중외비(中外比)로 끊는 문제로 환원시켜 이 작도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피타고라스는 이 정오각형에서 생기는 성형오각형(星形五角形)을 그의 교단의 휘장(徽章)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에 기여한 공적은 매우 크며, 그의 영향은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지구가 구형(球形)임을 확신하고, 또 중심화(中心火)의 주위에 지구와 태양 및 기타 행성이 원궤도로 회전한다는 일종의 지동설을 제창하였으나, 다른 학자들의 인정은 받지 못하였다.

 

하디(1877.2.7~1947.12.1)

영국의 수학자. 잉글랜드 서리주 출생. 옥스퍼드대학에서 기하학을 강의하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순수수학 교수로 있었다. 해석적 정수론에 많은 업적이 있고, 가법적 수론(加法的數論)에서의 오일러법의 개량, 제타함수에 관한 ‘리만의 예상’의 연구 등이 알려져 있다. 푸리에급수에 대한 기여도 중요하다. 1908년에는 독일의 의사 W.바인베르크와 동시에 하디-바인베르크의 법칙을 제시했다.

 

하세(1898.8.25~1979.12.26)

독일의 수학자. 카셀 출생. 할레대학·괴팅겐대학·베를린대학을 거쳐 1950년 함부르크대학 교수가 되었다. 대수학(代數學)의 연구에서 뇌터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의 학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특히 19세기 말 이래의 J.W.데데킨트, 힐베르트 등이 창시한 대수학의 공리화(公理化) 방향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유체론(類體論)의 정리(整理)와 대수함수론·정수론(整數論) 분야에서의 업적이 두드러진다.

 

하승천(何承天/370~447)

중국 남북조 시대의 수학자·천문학자. 송(宋)의 동해담(東海:山東省) 출신. 저작좌랑(著作佐郞)이라는 관직으로 국사를 편찬하는 일을 맡았다가 나중에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지위에 올랐다. 모든 학문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산학(算學)과 역학(易學)에 뛰어나서 원가력(元嘉曆)을 만들었다. 《달성론(達性論)》을 저술하였고, 인간은 한 번 죽으면 형신(形神:신체와 영혼)이 함께 멸하며 내세의 응보는 없다고 주장하여 종병(宗炳)·안연지(顔延之)와 논쟁을 벌였고, 육조사상계(六朝思想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우스도르프(1868~1942)

독일의 수학자. 브레슬라우 출생.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배우고, 1902년 이 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후에 본대학 교수가 되었다. 집합론·위상공간론(位相空間論)을 연구하고, 특히 위상공간을 공리계(公理系)에 의해 정의(定義)하려고 시도하여, 이른바 ‘근방(近傍:Umgebung)’의 개념을 수립, 이 방면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근방공간 또는 그의 이름을 붙여서 ‘하우스도르프공간’이라 불리는 것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주요저서에 《집합론 강요:Grundz웗e der Mengenlehre》(1914) 《집합론》(27)이 있다.

 

호퍼(1906~1992)

그레이스 호퍼는 뉴욕에서 태어나 Vassar대학과 예일 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Vassar에서 수학 부교수였던 호퍼는 1943년 해군에 합류했다. 그녀는 하버드 대학교에 있는 Howard Aiken 전산 연구소에서 최초의 대형 U.S.컴퓨터인 Mark 1의 프로그래머로서, 전기 컴퓨터의 선구자로서 일했다. 1950년에서 1960년에 걸쳐 Eckert - Mauchly Computer Corporation에서의 그녀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호퍼는 최초의 컴파일러를 발명해 냈다. 이 컴파일러는 영어를 기계어로 컴퓨터에 대한 명령을 번역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녀는 Flow - Matic 프로그래밍 언어와 일반 상업 중심 언어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경영과 프로그래머를 오가며 컴퓨터에 대한 산업과 사업에서 흑자를 보았다. 그녀는 미국 해군 연구소에서 퇴임했으나 컴퓨터 프로그램과 언어를 표준화하는 해군의 프로그램의 감독을 위하여 다시 기용되기도 했다. 1973년 그녀는 영국 회의 특별 조치로 해군대령이 되었으며 1983년에는 해군 소장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호퍼는 1986년 해군에서 전역하여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디지털 장치 회사)의 수석 고문으로서 봉사했다. 그 후 1992년에 타계했다.

 

해리엇(1560~1621)

영국의 수학자·천문학자.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후, 월터 롤리경(卿)의 수학 가정교사가 되었다가 그 인연으로 1585년 미국으로 가서 측량사가 되었다. 천문학자로서는 G.갈릴레이와 거의 같은 때에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관측을 시작하여 목성(木星)의 위성을 관측하였으며,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고 물질의 밀도와 굴절률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고찰을 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은 수학 영역에서의 방정식 연구인데, 인수분해를 이용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한다. 또 근(根)과 계수와의 관계를 정식화(定式化)하고, 부등기호를 도입하는 등 방정식의 해법을 포함하는 대수학의 근대적 정식화에 공헌하였다. 저서에 《해석학의 실제》(1631) 등이 있으며 영국 최초의 대수학자로 꼽힌다.

 

해밀턴(1805~1865)

영국의 수학자·이론물리학자.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통하였다. 백부(伯父)의 외국어 교육으로 13세 때에 이미 10여 가지 외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수학에 흥미를 가지고 뉴턴·라그랑주·라플라스 등의 저서를 읽어, 대학 입학 당시에는 이미 수학을 거의 통달하였으며, 또 광학계(光學系)에 관한 뛰어난 이론과 아이디어를 창안하였다. 1824년 더블린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 27년 재학 중인 칼리지의 천문학 교수로 선임되었으며, 던싱 천문대장을 겸하였다. 이듬해 《광선계의 이론》 제1부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해밀턴의 특성함수(特性函數)를 도입한 것으로, 광학계에 대한 일반적인 대수적 이론을 세운 것이며, 기하광학(幾何光學)의 기초이론이었고, 후년의 역학이론을 출발시키는 기본이 되었다. 이어 원뿔굴절[圓錐屈折]을 예견하였는데(1832), 이것은 H.로이드에 의하여 실증되었다. 그 무렵부터 광학을 도입한 역학의 모든 분야에 이를 확장시키려는 시도에서 특성함수를 사용한 빛의 전파(傳播)와 질점(質點)의 운동을 통일, 34년 변분원리(變分原理)라고 하여 ‘해밀턴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또한 ‘해밀턴의 정준운동(正準運動) 방정식’을 수립함으로써, 해석역학(解析力學)의 기초를 확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4차원법’을 착상하여 그 이론의 전개에 노력하였고, 이론물리학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용성을 밝히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의하여 대수계(代數系)에 대한 다양한 길이 열렸고, 그 후의 대수학 및 물리학에 대한 응용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워즈워스·콜리지 등과도 교유하였다.

 

헤론(?~?)

그리스의 기계학자·물리학자·수학자. 62~15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하였다. 이론보다 수학·역학의 응용면에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조준의로 토지를 측량하거나 월식(月蝕)을 이용하여 로마∼알렉산드리아의 거리측정하였다. 또 일종의 증기터빈인 ‘헤론의 기력구(汽力球)’와 수력(水力) 오르간, 주화(鑄貨)를 넣으면 물이 나오는 ‘성수함(聖水函)’, 기타 여러 가지 자동장치를 발명하였다. 그 일부는 선배들의 발명을 모방·개량한 것이라 한다. 수학에서는 꼭지부분을 잘라낸 피라미드(사각뿔대)의 부피나 제곱근·세제곱근의 근사값을 구했으나, 유명한 ‘헤론의 공식(3각형의 3변의 길이에서 그 넓이를 구하는 방법)’은 헤론 자신의 발견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 많은 유용한 고안이 당시의 사회제도(노예제도)에서는 놀이감으로 밖에 쓰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저술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주요한 것으로는 《측량술》 《조준의(照準儀)에 대하여》 《기체장치(氣體裝置)》 《자동장치의 제작법에 대하여》 《발사무기의 제작술》 《구적법(求積法)》 《입체기하학》 등이다.

 

헤세(1811~1874)

독일의 수학자. 쾨니히스베르크대학·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를 거쳐 1869년에는 뮌헨 공업대학 교수가 되었다. 대수곡선론(代數曲線論)에서는 헤세곡선, 유클리드기하학에서는 평면 간의 거리에 관련하여 초(超)평면의 방정식으로서 헤세의 표준형을 제출하였다. 또한 불변식론(不變式論)의 연구에 있어서 유명한 ‘헤세 형식’은 대역변분법(大域變分法)에도 쓰이고, ‘헤세 행렬’의 정칙성(正則性)이 임계점(臨界點)의 퇴화의 판정조건(判定條件)으로 여겨지고 있다.

 

화뤄겅(華羅庚/화나경/1910.11.12~1985.6.12)

중국의 수학자. 장쑤성[江蘇省] 출생. 15세에 다른 학업을 중단하고 수학을 독학하였고, 1931년 칭화[淸華]대학 부속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그 후 이 대학 수학과 조수가 되었고, 수년 후에는 강사로 발탁되었다. 36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여 쿤밍[昆明]의 시난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수학 교수가 되었다. 45년 소련을 방문하였다가 이듬해에 귀국하였고, 한때 중국의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대학에서 강좌를 가졌다. 50년 중국으로 돌아가 칭화대학 교수로 복직하였다. 그 후로 58년 중국기술대학 부학장, 78년 과학기술원 부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수학상의 업적 《퇴루소수론(堆累素數論:加算的素數論)》은 41년에 완성되었으나 출판이 되지 못하였고, 46년에 소련에서 출판하였다. 그밖에 《수론도인(數論導引)》(57) 등의 저서가 있다.

 

화이트헤드(1861.2.15~1947.12.30)

영국의 철학자·수학자. 램즈게이트 출생.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후 1885∼1911년 동 대학의 강사, 14∼24년 런던대학 교수, 24∼37년 미국 하버드대학 철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처음에 G.W.라이프니츠, L.A.쿠튜라, H.G.그라스만 등의 영향하에 수학적 논리학(기호논리학) 연구에 종사하였고, B.러셀과의 공저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3권, 1910∼13)를 저술하여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확립하려 하였다. 이어 근대의 새로운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를 고찰하여 《자연인식의 제원리(諸原理):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19)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20) 《상대성 원리:The Principle of Relativity》(22)를 집필하여 ‘사상(事象:event)’의 개념을 사용해서 자연에서의 모든 사상 상호간의 확급(擴及) 및 상입(相入)의 원리를 구명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자연과학에서도 항상 경험과 구상성(具象性)을 존중하고, 사변적(思辨的)·추상적 태도를 배척하였다. 도미(渡美) 후의 저서 《과학과 근대 세계: Science and Modern World)》(25)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33)은 ‘유기체(organism)’의 개념을 중핵으로 하는 그의 발전적·창조적 형이상학을 전개한 것이다. 그 밖의 주요저서에는 《보편대수학(普遍代數學):A Treatise on Universal Algebra》(1898) 《상징주의:Symbolism》(1928) 《과정과 실제:Process and Reality》(29) 《이성(理性)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29) 《자연과 생명:Nature and Life》(34) 등이 있다.

 

힌친(1894~1959)

소련의 수학자. 1922년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 후의 수학 발전에 공헌한 모스크바 학파의 유력 멤버이다. 1920년대에 이루어진 반복로그법칙에 관한 연구에 이어서, 생물학·물리학·통계학·공학에 대한 확률론의 응용을 전개하여 우연과정(偶然過程)에 대한 극한정리의 연구(그 안정성과 무한분할법칙)로 알려져 있으며, 또 신뢰도이론(信賴度理論)·제어이론(制御理論)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확률론과 동역학계(動力學系)와의 관계에서 정수론(整數論)의 디오판토스 근사(Diophantos 近似)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整數不等式의 解)을 남겨 스탈린상(賞)을 받았다(1940). 주요저서로는 《통계역학의 수학적 기초》가 있다.

 

힐베르트(1862.1.23~1943.2.14)

독일의 수학자.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현대수학의 여러 분야를 창시하여 크게 발전시켰다.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을 졸업한 뒤 이 대학의 강사를 거쳐 1893년 교수가 되었다. 95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겨, A.후르비츠, H.민코프스키와 함께 괴팅겐대학을 세계 수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힐베르트의 학풍을 찾아 우수한 수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만년에는 나치스의 박해를 받았지만 전혀 굽히지 않았고, 괴팅겐에서 죽었다. 업적은 수학의 거의 모든 부문에 미치고 있으나, 특히 대수적 정수론(代數的整數論)의 연구, 불변식론(不變式論)의 연구, 기하학의 기초확립, 수학의 과제로서의 몇몇 문제의 제시, 적분방정식론의 연구와 힐베르트공간론의 창설, 공리주의수학기초론(公理主義數學基礎論)의 전개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저서 《기하학의 기초》(1899)에서 제시한 공리계(公理系)에 의한 기하학의 이론 구성 문제는 그가 1900년 파리의 수학자회의에서 행한 수학의 전망에 관한 강연과 함께 수학에서의 공리주의의 방향을 자리잡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준 획기적인 것이었다.

펌:http://blog.daum.net/hanlim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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